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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는 눈(왕하 6:8-17)

미국의 32대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취임연설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두려움 그 자체 뿐(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이라고 했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앞에서 두려워 떠는 미국 사람들에게 필요한 연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가?

사실은 우리가 두려워할 것들이 있다. 두려움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대상은 두려워해야 한다. 예를 들면, 물과 불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돈을 위해서 불법 증축이나 개조 그리고 방치를 하다가는 물이나 불에 의해서 생명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라고 가르치는데, 이 말은 곧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뜻이다(시 128:1).

두려워할 대상이 있는 반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대상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담지 못하고, 찰싹 거리는 파도가 무서워서 바닷물에 한 발짝도 넣어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어리석은 일이다. 그럼 적군이 우리의 성을 포위해버렸다면, 무서워해야 할까? 적군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으니 무서울 것이다. 하지만 이때 엘리사 선지자는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는 보이는 현상을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천군천사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일들이 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더 이상의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러할 때, 무서워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인가?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 같지 않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홍해를 갈라주시기도 하셨지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는 도움을 주시지 않으셨고 아이성을 공략할 때에도 도움을 주지 않으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신다는 확신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아야 한다. 그 이유는 염려는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마 6:27)라고 말씀하셨다. 더 나아가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대로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는 않을지라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고, 따라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방치해 두시지 않으며, 결국에는 모든 것을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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