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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논과 다말(삼하 13:1-19)

오늘 우리는 별로 기쁘지 않은, 참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나 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참된 사랑의 이야기를 듣고 싶고, 정말 희생과 그리고 봉사와 배려하는 모습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정말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정말 좋지 않은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를 우리가 읽게 되었습니다. 암논과 다말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 다윗의 가정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아주 추악한 이야기를 성경이라고 하는 곳에서 읽게 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애석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간의 사랑을 통해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그리고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을 창조의 규례로, 하나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부부간의, 부부간의 사랑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그런 성적인 연합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축복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가장 추악한 모습의 성적인 타락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대로,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방법대로 사용하지 아니하는, 그런 성의 잘못된 사용은 가정을 파멸시키고, 사람들을 아주 사람들과의 관계를 아주 파멸로 이끄는 독약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그래서 부부가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그 모습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연세가 드셨음에도 불구하고, 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끝까지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그 모습을 볼 때, 참 많은 감동을 받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성적인 관계는 추악한 것일 뿐만 아니라, 더럽고 아주 불쾌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방법대로 사용된 것이 얼마나 추한 모습이 될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기분 좋은 이야기가 아니고, 참 불쾌한 이야기지만,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기록된 것은 다 우리들이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영적인 교훈을 얻으라고 이 말씀을 기록해 준 줄로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1절 말씀에 보면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지,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얻어야 될 영적인 교훈이 무엇인지,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귀하고 복된 시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우리가 묵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왜 이러한 비참한 일들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물론 이 두 사람의 악한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지만, 그 이전에 원인들을 더 추적하고, 또 추적해 들어간다고 한다면, 어떤 원인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윗에게 여러 명의 아내가 있었다고 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기는 하였으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지 아니한 방법들을 종종 사용했는데요. 그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여러 명의 아내를 둔 것입니다. 다윗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으니까, 우리들도 일부다처로 결혼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시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됩니다!

미국의 어떤 사이비 종파에서는, 성경을 읽어보니, 아브라함도 아내가 여러 명이었고, 또 야곱도 아내가 여러 명이었고, 다윗도 아내가 여러 명이었으니, 우리도 여러 명의 아내를 두어도 되는 것이고, 그것이 성경적인 원리라고 주장하는 그런 사이비 종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이 이야기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모범이기 때문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완벽하지 못하고, 실수하고, 정말 많은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00%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죄악을 저지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못했던, 그런 연약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경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경적인 원리라고 한다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주 안에서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 그것이 성경적인 원리인 것이지, 이렇게 많은 아내를 두거나, 많은 남편을 두는 것은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보통 사람들도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이 잘못이지만,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왕들에 대해서 규정하면서, 왕이 세워진다고 한다면, 그 왕은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특별하게 규정해 주셨습니다. 신명기 17장 14절부터 19절의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 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내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그가 왕 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이게 언제 쓰여진 말씀입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들 가운데 왕을 세우게 된다고 한다면, 그 왕은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는, 그 내용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면, 왕이 되었을 때, 누구를 많이 두지 말라?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안타깝게도 다윗은 그 말씀을 지켰습니까? 안 지켰습니다. 다윗에게는 많은 아내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내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면, 이 말씀에 따라서, 오직 한 아내만을 두어야 했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윗은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고, 결국 그 여러 아내들 가운데서 태어난 자녀들 사이에, 이런 갈등과 성적인 추악한 문제들이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주어졌는데,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의 축복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행하고, 이 말씀대로 따르면, 그러면 결국 우리가 복된 삶을 살 수가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다윗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암논과 다말 사이에 추악한 일들이 벌어지게 되고, 결국 이 일로 인하여 다윗의 자녀들 사이에, 정말 고통스러운 일들이 슬픈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문제들이 생길 때마다, 그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합니까? 살다 보니까, 어쩌다 보니까,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한 데서부터, 문제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다윗이 아내를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을 두기 시작할 때부터, 3명을 두고 4명을 두고 여러 명의 아내를 두기 시작한 그때부터, 문제가 시작되기 시작한 거예요. 당장 그 결혼할 때는 아무 일 없는 것 같아요. 두 명이 있어도 괜찮은 것 같고, 3명이 있어도 괜찮은 것 같고, 그래도 살 만하다고 생각이 되었을지 몰라요. 하지만 결국에는 문제가 발생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과연 우리의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벗어나면, 결국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탈선한 것이 없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귀하고 복된 시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암논이라고 하는 다윗의 아들이 다말이라고 하는 자신의 배다른 누이를 연모하고 있을 때, 요나답이라고 하는 친구가 와서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그 요나답이라고 하는 사람은 조언을 할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을 이야기해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해 준 것이 아니라, 간교한 계략을 이야기해준 것이죠. 병든 척해서 다말을 유인하고, 그래서 그 다말을 겁탈하라고 하는, 사악한 그런 조언을 하게 되는데, 이런 사악한 조언에 암논이 넘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암논이 왜 그 사악한 계략에 넘어가고 말았을까요? 그것은 이미 암논의 마음 가운데, 이미 나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을 해요. 요나답이 와서 “이렇게 해봐라”라고 했을 때, 그래서 “그런 방법도 있나?” 하면서 넘어간 것이 아니라, 성경에는 그렇게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암논의 마음 가운데, 이런저런 나쁜 생각들이 많이 떠오르고 있는데, 나쁜 생각들이 이런 생각도 있고, 저런 생각, 이런 나쁜 생각, 저런 나쁜 생각들이 많이 있는데, 그 많이 있는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요나답이라고 하는 친구가 와서, 그 나쁜 생각을 일깨우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었을 때, 그 말을 듣고서 행동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들은 죄를 잘 지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죄짓는 게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어려워요! 죄짓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 어려워요. 왜 어렵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심령 가운데 심어놓은 양심 때문에 어려운 거예요. 우리가 만일 죄를 지으려고 하면, 양심이 두근두근거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죄를 지으려고 해도, 양심에 두근두근거려서, 함부로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파수꾼이 모두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쁜 짓을 하려고 해도, 양심의 가책이 돼서, 우리들의 마음이 두근두근거려서, 함부로 나쁜 짓을 잘 못하게 되는 거예요. 근데 사람이 언제 악을 행하는가? 내가 두근두근거려 가지고 악을 잘 행할 수 없는데, 누군가 와서 악을 행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해 주면, 자유함을 얻는 것이죠. “맞아.” 내가 그 일을 하려고 했는데, 용기가 나지 않고, 자신이 없어서, 양심에 가책이 생겨서, 내가 하지 못했는데 누군가 나타나서 죄를 저지를 수 있는 동지가 나타나니까, 자신 있게 그 죄악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죠.

옛날에 우리 딸아이가 우리 딸아이들한테 제 아내가 말을 했습니다. “침대 위에서 과자 먹지 마라.”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엄마의 말을 들은 우리 꼬마 아이들이 침대 위에서 과자를 먹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침대 위에서 과자를 먹으려고 하고 있는데, 제가 그 모습을 보고, “야, 엄마가 너 침대 위에서 가져 먹지 말라고 했는데”라고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랬더니 우리 딸아이가 이렇게 하다가 그 과자를 제 입에 딱 넣어주더라고, 그래서 자기 혼자 침대 위에서 과자를 먹으면, 엄마한테 혼날 것 같은데, 아빠가 같이 먹으면, 자신감이 생기는 거죠. 자신감.

죄를 짓는 것은 정말 간덩이가 부어야 할 수 있는 거예요. 정말 용기가 있어야, 죄를 지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다들 죄를 못 짓고 있는데, 누군가 동지가 나타나면 용기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번에 미국에서 지금 아주 흑인 한 사람이 경찰에 의해서 무참히 살해되는 일을 계기로 해서, 지금 미국 전역에서 항의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고, 항의 시위 과정 가운데서 약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예. 지금 시위대들이 몰려다니는데, 그 시위대들 안에, 또 누가 섞여 있냐면, 약탈자들이 같이 들어가 가지고, 그 가게들마다 다 문을 부수고, 명품 가게에 들어가서, 명품 백들을 다 훔쳐가고, 그리고 슈퍼마켓에 들어가서, 슈퍼마켓의 물건들을 다 뺏어 오고, 복권기계에서 복권 기계를 때려 부수어서, 그 안에 있는 복권을 훔쳐가고 atm기에서 atm기를 때려 부수어서, 거기서 돈을 빼가는 겁니다. 이게 맨 정신으로 할 수 있는 겁니까? 할 수 없는 겁니까? 맨 정신으로 못하죠. 왜요? 양심의 가책 때문에 못하는 것이고, 또 했다가는 경찰한테 잡힐 수 있으니까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주 자신 있게 약탈을 하고 있어요. 왜 자신 있게 약탈을 하는 거죠? 혼자 하는 게 아니고, 여러 사람이 같이 하는 거예요. 자신만만하게 하는 겁니다.

언제 우리는 죄를 짓게 되는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죄를 짓고 싶은 마음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나에게 죄악의 동지가 되어주고, 내가 죄를 저지르는 것에 대한 동조를 해주게 된다면, 우리는 죄를 짓게 되는 것이죠. 때로는 죄악을 저지르는 것을 정당화하는 방법을 통해서 죄를 짓는 것이죠. 예전에는 동성애를 저지르면 창피한 줄 알았고, 죄짓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아무런 죄가 아니라고 그렇게 당당하게 이야기하면서, 같은 사람들이 같이 연대함으로 말미암아, 죄가 아니라고 하는 그런 정당하다고 말하면서, 죄를 저지르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공경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바쳐버리기만 하면, 하나님께 물건을 바치기만 하면, 그 물건으로는 부모님을 섬기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논리가 뒤따라주면, 그러면 부모에게 효도를 하지 않는 것이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부부 가운데 어떤 한 사람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가, 그 가운데 일부를 숨겨주고자, 숨기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 아내가 옆에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동조해 주고 같이 맞장구를 치는 사람이 있을 때, 결국 죄악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이 죄라고 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정당화하면서 죄를 짓는 것이죠. 로마서 1장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하지만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복 있는 사람은 시편 1절 2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죄의 유혹이 항상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럴 때 죄의 유혹에 따라 끌려 다닐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들려주시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죄악의 음성을 짓밟아버리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분노하는 것은 죄인데,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분노하는 것이 당연한 권리라고 우리를 속입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것들을 자꾸만 보여주게 만 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들으면서, 사랑의 모습을 가져야 되겠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늘 두 가지 싸움인데요. 로마서 7장 22절에서부터 25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 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들에게 죄를 선동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자체를 방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날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사탄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사탄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을 때,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멸망하게 되는 것이고, 그 순간에 성령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아니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면서 살아간다고 한다면, 그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 17절 말씀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사탄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말씀으로 그 사탄의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와서, 다른 거 시험한 것이 아니라, 먹으라고 시험했어요. 가장 연약하고 가장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배고픈 사람에게 제일 유혹거리가 뭡니까? 먹으라고 한 것이지요. 먹으라고 하는 것으로 유혹하게 되었을 때, 그 순간에 이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친 것입니다.

암논에게 있어서 가장 달콤한 사탄의 유혹이 무엇입니까? 내 누이를 꾀어서, 겁탈하라고 하는, 그 요나답의 그 충고야말로 그에게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그 말로 사탄은 유혹하는 거예요. 우리들에게 가장 민감하고, 우리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던 부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가장 민감한 부분이 될 수가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교만함이 가장 민감한 부분이 될 수가 있을 겁니다. 특별히 남성분들에게는 자존심이 가장 큰 민감한 부분이 될 수가 있을 겁니다. 잘난 사람들에게는 교만이 민감한 부분이 될 수가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절망감과 불평과 시기와 불만들이 그 사람에게 가장 민감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을 텐데, 사탄은 우리가 가장 그 민감한 부분을 공격해 올 수가 있을 텐데, 그때 우리는 요나답의 충고를 들었던 암논처럼 사탄의 방법에 따라 끌려가는 인생이 아니라,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승리하셨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담대하게 외치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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