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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다한 증인들(고전 15:1-11)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으시는 그 모습은 가장 충격적인 일이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예수님에게 소망을 걸고, 자신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따랐던 제자들입니다.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직업 세리의 직업을 버리고, 최고의 직업들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과 함께 동거동락했던 그 제자들의 눈앞에서, 예수님이 처참하게 아무 힘도 없이 쓰러져 버린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 십자가에 매어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제자들이 느꼈을 절망을 상상해 보실 수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가장 절망적인 것을 꼽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일 것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을 끝내버리는 가장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패하는 것도 절망적이기는 하지만, 죽음에 비하면 그렇게 절망적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패도 절망적이기는 하지만, 실패했다고 해서 끝장이 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수고를 합니다. 연애를 하기도 하고, 사업을 하기도 하고, 주식 투자를 하기도 하고, 공부를 하기도 하고, 수많은 노력을 하는데, 그런 노력 가운데서 실패하는 일들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 종종 있습니다. 대학 입시를 위해서 열심히 수고하고 애썼지만, 수학능력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서, 안타깝게도 재수를 해야 하는 그런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실패한다고 해서 슬프고 절망스럽기는 하지만 완전히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재수하면 되거든요. 주식 투자를 해서 실패를 하고,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하고, 연애를 하다가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그리고 굳이 대학에 가는 것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가지고 있던 꿈들이 실현되지 못하고, 그 꿈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을 포기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절망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꿈만이 내가 가졌던 그 꿈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고, 오히려 실패를 통해서 우리는 더 좋은 길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 내가 알지 못했던 더 나은 길로 가게 되는 그런 방향을 틀게 되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첫사랑이 실패로 끝나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아요. 첫사랑에 실패하면, 그래서 정말 죽을 것 같지만, 그런데 시간 지나고 보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번에 하는 선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서 선거에 출마하였습니다. 전국적으로 4대 1이 넘는 그런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국회의원을 도전하게 되는데요. 이번 선거에서 과연 대권을 꿈꾸고 있는, 그런 대권 잠룡들이 누가 당선이 되고, 누가 당선이 되지 못할 건가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데 그렇게 꿈을 꾸던 사람들이 이번 선거에 졌다고 해서, 낙선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일까요? 끝이 아닐까요? 끝이 아닙니다. 낙선했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칠전 8기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노무현 대통령도 낙선의 경험이 있었던 사람들인데, 나중에 다시 재기했던 그런 정치인들인 것을 생각해 보면, 이번에 선거에서 떨어진다고 해도, 슬프고 절망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낙담할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쌓았던 재물들이 화재로 인해서 다 사라지게 된다고 하면, 정말 슬프고 절망적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아예 소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빼도 박도 못하고 정말 절망적인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죽으면은 두 번의 기회가 없어요. 죽으면 그걸로 끝이에요. 그래서 절망적인 거예요. 다른 것은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다른 것은 또다시 기회가 주어질 수 있고, 다른 것은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있는 것이지만,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리는 거예요.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옛날에 있었던 여러 가지 민중 봉기들, 혁명들이 있었는데, 그러한 민중 봉기와 혁명들이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율법교사가 한 이야기가 기록돼 있습니다. 그 옛날 한때 불붙듯이 일어났던 그런 혁명들, 민중 봉기들이 어떻게 소멸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지도자가 죽음으로써 다 끝나버렸다고 하는 겁니다. 드다라고 하는 사람이 일어났을 때, 400명이라고 하는 추종자들이 있었지만, 드다라고 하는 그 지도자가 죽음과 더불어서 사라지게 되었을 때, 그 민중 봉기를 일으켰던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호적하게 되었을 때 갈릴리의 유다라고 하는 사람이 일어나서 혁명을 꿈꾸었지만,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 주변으로 몰려들었지만, 그 일이 어떻게 끝나게 되었는가? 갈릴리 유다라고 하는 지도자가 죽게 되었을 때, 그 운동이 다 사라지고 말았다고 하는 것을 사도행전 5장 가운데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무엇입니까? 죽음은 모든 것을 끝장 내버리는 가장 강력한 것이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46편 3절 4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아무리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아무리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운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생명이 끊어져버리게 되면, 그 사람의 생명이 끊어짐과 동시에, 모든 계획, 모든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통령 가운데 김영삼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김영삼 대통령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IMF가 떠오르십니까? 아니면 금융실명제가 떠오르십니까? 아니면 하나회를 척결한 것이 떠오르십니까?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이 있는데, 하마터면 하마터면이라고 하는 표현이 좀 그렇고요. 이럴 수도 있었어요. 김영삼 대통령 하면 무엇이 떠오를 수도 있었냐면, 노벨상이 떠오를 수도 있고, 남북 정상회담이 떠오를 수도 있었습니다. 혹시 기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1994년 6월에 미국의 전 대통령이었던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서 김일성 주석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김일성 주석과 담판을 벌여서,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북한이 IAEA의 사찰을 받는 것으로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카터 대통령이 우리나라로 넘어와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김영삼 대통령에게 남북 정상회담을 하라고 권유를 했는데, 그때 김영삼 대통령이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김일성 주석과 남쪽에 김영삼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을 최초로 하겠다고 합의를 해서, 그래서 예비 접촉을 하고 모든 것들을 다 만들어 놨어요. 그래서 1994년 7월 25일부터 27일 사이에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영삼 대통령이 만나서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하겠다고 계획을 세워놨어요. 그래서 그 계획이 성사되었다고 한다면,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을 한 대통령의 이름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아니라, 김영삼 대통령의 이름이 역사책에 기록이 됐을 것이고, 그리고 그 김영삼 대통령이 무엇까지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노벨상도 받을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게 성사가 되지 못했어요. 왜 성사가 되지 못했죠? 7월 25일 날 정상회담을 하기로 했는데, 17일 전인 7월 8일 날 김일성 주석이 죽은 거예요.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됐어요. 김영삼 대통령을 어쩌면 우리나라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만들어 놓을 어마어마한 사건이 바로 코앞에 놓여 있었는데, 불과 17일 전에 김일성 주석이 죽게 되니까, 모든 것이 날아가 버렸고, 그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은 그다음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에게로 넘어가 버리는 그런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었습니다. 그게 뭡니까? 바로 죽음인 거죠.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내버리고,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이 죽음인데, 그 죽음이 누구에게 찾아왔는가? 바로 예수님에게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하게 돌아가셨을 때, 그 충격은 말로 형언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3년 동안, 혹은 어떤 학자가 말하는 것처럼 4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다녔는데, 자신의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해 버렸는데, 예수님께서 처참하게 죽어버리신 것입니다. 그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소망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일말이라도 가지고 있었을까요? 전혀 가지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제자들은 절망 가운데 있어서 좌절하고 쓰러진 것이 아니라, 그 제자들이 다시 일어나서 예수님을 선포하면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하고 다니는 제자들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그 이후에 갑작스럽게 전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수많은 성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해서, 불과 몇 년 만에 1세기가 가기도 전에, 유럽과 아시아를 완전히 덮어버렸다고 하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것은 불신자든 크리스천이든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무엇이냐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AD 30년 경인데, 그 AD 30년 경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지, 100년도 되기 전에 아시아와 유럽 전체에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고 하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기독교가 얼마나 빠르게 전파되었는지, 그 당시에 있었던 관리가 로마 황제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뭐라고 표현하냐면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빨리 퍼지는데, 그 기독교를 뭐라고 표현했을까요? 이렇게 빨리 퍼진다고 하는 의미에서, 그 관리가 황제에게 쓴 편지에 뭐라고 표현했냐면, 기독교는 전염병과 같다고 그랬어요. 전염병과 같이 퍼진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가 얼마나 빨리 퍼집니까? 중국 우한에서 전염병이 발병했다고 하는 그 소식을 들은 것이 얼마 전입니까? 불과 한두 달 전이에요. 그 한두 달 전에 발생했던 그 전염병이 불과 두 달이 지나는 그 사이에, 전 세계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염이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버린 전 세계에 전염병이 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1세기에 기독교가 퍼져나가는 그 퍼져나가는 그 속도를 보니까, 마치 전염병이 옮기는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꾸만 퍼져나가는데, 그 전염병이 퍼지는 것처럼 기독교가 퍼져나간다고 그 당시 그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총독이 관리들이 로마 황제에게 보고했다고 하는 것이 역사적 문서로 남아져 있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죽음, 예수님께서 죽으셨는데, 그런데 그 죽음이 보통 죽음이 아니라, 그냥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죽음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로마 사람들의 관점으로 보면, 이 예수님은 최고의 흉악범으로 죽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형을 집행할 때, 보통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흉악범들만, 악질의 죄를 저지른 사람들만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들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하는 것은 죄인 중에서도 가장 흉악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고 낙인이 찍힌 죽음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렇게 흉악범으로 죽은 예수님.

더 나아가 유대인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죽음이었습니다. 신명기 21장 23절의 말씀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라고 하는 그 말씀이 있는데, 유대인들은 이 말씀에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누군가? 의인인 줄 알았는데,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낙인이 찍힌 그 죽음을 예수님께서 죽었는데, 그 절망적인 죽음을 당하신 그 예수님이 불과 100년도 못 된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향해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믿음이 전 세계로 순식간에 퍼졌다고 하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 절망적인 죽음과, 그리고 갑작스럽게 불어난 기독교의 그 부흥 사이에 무엇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까? 부활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예수님이 생명의 주가 되셨기 때문에,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믿음이 전 세계에 퍼져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믿을 수 있는 만한 일입니까? 믿을 수 없는 일입니까? 믿기 어려운 일입니까? 믿기 어려운 일이에요! 누군가 죽었으나 장사되었으나 3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냥 쉽게 믿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환영하고, 그 소식을 쉽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도마는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눈으로 봐서는 모르겠고, 내가 만져야만 믿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던 마리아도, 예수님을 만나놓고도,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거라고 믿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예수님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회심하기 전에 교회를 핍박하며 다녔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고백하는데, 그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뭐라고 고백합니까?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이죠.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고백인 줄 아십니까? 당시 유대교는 어떤 종교입니까? 유일신 종교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말하는 종교가 유대교예요. 그 유일신 종교였던 유대교회 토양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일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그 유대교에서 자라났던 그 사람들의 입에서,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발생한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 유대인들의 마음 가운데서 예수님이 나에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아주 훌륭한 달변가가 있어서, 그들을 설득하고 논리적으로 증명해서, 그래서 논리적으로 그들을 설득시켰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대화해보셔서 알겠지만, 여러분들이 아무리 설명해도, 그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논리적으로 아무리 전후 기승전결 논리를 세워가면서,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게 해서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상대방이 그 논리에 따라서 “아, 그렇군요.” 하고 생각을 바꾼 적이 있습니까? 못 바꿔요. 성경 말씀을 잘 풀이해 주면, “아, 그렇구나.” 하면서, 사람들이 그 생각을 바꾼 적이 있습니까? 바꾸질 않아요!

사람들은 생각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번 선거에서도 아시겠지만, 각 가정에서 정치적인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 서로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이 정치적인 입장을 바꾼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싸움만 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정치적인 입장이 다르면, 싸우면 싸웠지. 생각을 바꾸지 않아요. 아버지와 아들이 정치적인 입장이 다르면, 싸움이 나지, 서로의 논리에 따라서, 그 상대방이 자신의 입장을 바꾸는 법이 없어요. 여당 지지자는 끝까지 여당 지지자가 되는 것이고, 야당 지지자는 끝까지 야당 지지자가 되는 것이고, 누가 범죄를 저질렀던 비리가 드러나든 말든, 어떤 것은 좋은 정책을 실시하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죄를 지어도 끝까지 지지하는 사람은, 지지를 하는 것이고, 아무리 좋은 정책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정당을 싫어하는 사람은 끝까지 싫어하는 예요.

왜? 사람은 증거가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에 따라서, 내가 원하는 증거만을 선택하는 그런 옹고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못 박혀 죽은 흉악범이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예수를 불과 얼마 되지 아니하는 순간에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그런 생각의 변화가 가능하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주 유명한 달변가가 나와서, 당신의 생각을 바꾸도록 설득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러한 변화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거부하고, 믿지 않으려고 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바로 그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여기 있다.” 말씀해 주실 때, 그 앞에서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어서, 그 앞에 엎드리게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나타나 보여주신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여성들의 이름은 적어놓지 않았습니다. 여성들 앞에 나타나셨는데도 불구하고, 적어놓지 않았습니다. 더 많이 있다는 얘기죠. 오늘 리스트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나타납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게바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믿지 않고 거부하고 두려워 떨고 있던 열두 제자들에게 나타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500여 형제들에게 나타나 주셨습니다. 야고보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핍박하고 박해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있던 바울에게도 나타나셨어요. 그 바울의 마음을 완전히 변화시키시는 놀라운 일을 해 주셨다고 오늘 성경 말씀 가운데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삶은 180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논리적인 설득으로 그들이 바뀐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보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들은 변화되었고, 변화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 세계로 전파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야말로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었다고 하는 것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산 증거입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원래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합니까? 유대교회 관점에서 보면,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고,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에, 저들은 신성 모독하는 사람들이고, 그런 신성 모독하는, 저런 악한 사람들은 죽여야 된다고 생각했던 바울 사도가 교회를 핍박하러 다니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그 바울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신 거예요. 그리고 그 바울 사도는 그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그의 삶이 180도로, 전에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전에는 부를 가지고 있었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던 그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전파하기 위하여, 모든 고난까지도 감수하는 사람으로, 180도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증거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믿게 됨으로 말미암아, 바울 사도가 얻을 수 있었던 이익이 무엇이겠습니까? 더 높은 권력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까? 더 많은 돈을 벌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았어요. 오늘날에는 안타깝게도 가짜 목사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사이비 목사가 있습니다. 왜요? 목사가 되는 길이 부를 얻기도 하고, 명예를 얻기도 하고, 어떤 파워를 얻기도 하는 그런 수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1세기에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더 높은 권력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만일 더 많은 돈을 얻기를 원했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그냥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더 많은 성공과 더 많은 돈을 벌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 바울 사도는 알거지가 됐고, 바울 사도는 핍박을 받았고, 온갖 고난과 온갖 모욕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그 복음을 전하러 다녔습니다. 그러한 변화를 본 사람들은, 원래 바울 사도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도무지 바울 사도를 이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 이렇게 변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바울 사도를 재판하던 베스토 총독이 바울 사도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가 미쳤구나. 네가 많은 학문을 하더니만, 네가 과연 미쳤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모든 권력과 모든 명예와 모든 부귀를 다 버리고, 배설물처럼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그 길로 복음을 전하는, 그 낮은 자리로 변화된 그 바울 사도의 모습을 보면서, “네가 미치지 않고야, 네가 왜 이러고 있느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그때 했던 바울 사도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성도 여러분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절입니다. 아니 매 주일 매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의 날들이 바로 주일날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은 허황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맹목적인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맹목적인 것을 믿으면 안 됩니다. 잘못된 것을 따라간다고 하면 그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이 확실하고, 그 확실한 것을 전한 그 사도들의 그 가르침이 확실하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그 믿음을 따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만일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절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무리 십자가와 같은 상황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 하더라도,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우리 앞에 놓여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절망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음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 38절에서부터 39절의 말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기쁨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믿으십니까?

우리가 가는 그 길은 쉽고 평탄한 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그 길은 절망의 연속일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사업은 어려워질 것이고, 또 코로나19가 아니라, 아니면 더 큰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 절망적인 일들도 만나게 될 겁니다. 때로는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질병이 우리에게 찾아올 수가 있어요. 때로는 절망 정말 견딜 수 없는 아픔과 어려움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어요. 그래도 우리가 바라봐야 될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놀라운 사랑을 가지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부활의 날에,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기념하는 그 부활의 날에,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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