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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나타내지 말라(막 3:7-12)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만난 귀신들린 사람들의 입에서 놀라운 고백이 나왔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영적인 세계는 서로 통한다는 생각이 사람들에게 있는데, 귀신들이 예수님의 실체를 알아보고 외친 것이다. 이러한 귀신들의 고백은 예수님에게 득이 될만한 것이었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주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얻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귀신들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으셨다.

이렇게 꾸짖으신 것은 믿음으로 연결되지 않은 지식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귀신의 문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데 있지 않다. 그들은 정확하게 알았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는 그 지식이 그들의 믿음을 창조할 수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할 수도 없었고, 주님을 신뢰하며 생생한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이러한 모습은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같았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이 기적을 행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 앞에 엎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지켜볼 뿐이었다. 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다. 하지만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고 생생한 관계 속으로 들어올 수는 없었다.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이다. 지식이 필요 없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지식도 필요하고,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주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가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지식이 하나님과의 생생한 사랑의 관계 속으로 이끌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하나님을 지식으로만 알고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을 실제로 나의 아버지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 됨을 누리는 것이 믿음이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 모른 척 한다. 심지어 거부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 같다고 실망한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일예배를 지나고 나면 하나님은 구석에 처박아 두고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 실제로 우리들의 삶에서 아무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는 믿음은 사실 귀신들의 의미 없는 고백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은 우리와 생생한 사랑의 관계를 누리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까지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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