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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는 일과 살리는 일(막 3:1-6)

안식일 날 회당 안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안식일이란 창조가 완성되어 하나님께서 쉬신 것을 기념하고 축하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예술가가 예술품을 만들어놓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작품을 감상하듯,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를 보시면서 즐기시는 날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안식일 날에 이 세상이 완전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보시고서 측은하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팔을 내밀라고 말씀하셨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사람의 팔이 온전해진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망가져 버린 이 세상을 회복하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이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바리새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가 예의주시하였다.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정말 아쉬운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칠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러한 반응을 보일 게 아니라, 예수님 앞에 나아가 “주여,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간구하는 것이 옳았다. 이 세상에 아픔이 없는 사람이 없고, 이 세상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주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 고발할 궁리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안식일 법을 예수님께서 위반하는지 주시하였다. 하지만 정작 안식일의 정신을 어긴 것은 그들이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안식일이 되게 만드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주의적 태도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일을 한 것이다. 우리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기독교적 진리를 주장하면서 반기족교적 행동을 할 때가 많다. 사람들은 우리들의 말을 들을면서 감동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행동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다.

불쌍한 사람이 있다면 측은한 마음으로 어떻게 도와야 할까를 묻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에게는 그러한 마음이 없었고, 오로지 예수님을 정죄하고 비난하려는 마음 뿐이었다. 그런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불쌍한 사람들을 향해서 품어주려는 마음보다는 쫓아내고 막아버리곤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죄를 보고서 천국의 문을 트랙터를 이용하여 막아버리지 않으셨다. 오히려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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