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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 4:5-7)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 내리라.” 하나님께서 천사를 명하여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라고 기록한 시편 91:11-12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도전했다. 이러한 사탄의 성경 사용을 보면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성경을 사용하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경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다. 심지어 사탄도 성경을 사용할 수 있다. 성경을 줄줄 암송하거나 말을 하면서 성경구절을 유창하게 사용한다면 우리는 그 앞에서 주눅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믿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경건한 사람은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당연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말씀을 유창하게 사용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이단이나 사탄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둘째, 아무리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시편 91:11-12의 말씀은 불안에 떨고 있는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들려질 수 있는 말씀이 아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이런 말씀을 사용하면 안 된다. 악을 행하고, 다른 사람의 포도원을 갈취하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우상숭배를 하게 만드는 아합 왕과 이세벨 왕에게 이 말씀으로 축복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심판의 메시지가 적절할 것이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들에게는 위로와 평강의 메시지를 말씀하셨지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해서는 저주를 선포하셨다. 미사일은 과녁을 잘 맞추어야 한다. 적군을 향해서 쏘면 그것은 칭찬받을 일일 수 있지만, 민간 비행기를 떨어뜨리면 비난받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엉뚱한 곳에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사탄이 예수님에게 시편 91:11-12의 말씀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 말씀의 오용이자 악용이다. 원래 이 말씀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라는 위로의 메시지였다. 마치 자전거를 배우는 아이에게 아빠가 붙잡아줄 것이고 넘어지지 않게 옆에서 지켜볼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라는 것과 같은 메시지였다. 그런데 동네 깡패들이 다가와서 “아빠가 너를 다치지 않게 보호해준다고 했으니, 어디 한 번 자살을 시도해봐”라고 부추긴다면, 아빠의 말을 악용하는 것이다. 아빠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래 아빠를 신뢰하라고 한 말인데, 오히려 아빠를 의심하고 시험하라는 말로 바꾼 것이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하나님을 그렇게 의심하고 시험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시험할 때가 있다.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말씀을 성경에서 읽으면서, 내가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먹여주실까? 배우자를 하나님이 알아서 찾아주실까? 공부를 안 해도 좋은 대학에 가게 해주실까? 그런 식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런 식의 생각은 내가 절벽에서 뛰어내려도 하나님이 안 다치게 해주실 거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생각이다. 그렇지 않다. 우상에게 절하지 않다가 풀무불에 들어간다면 하나님께서 구해주실 수도 있겠지만, 그냥 불속에 뛰어들면서 “하나님 구해주세요”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거부하셨던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두려워하지 않고 던지셨다. 십자가에 말이다. 하나님께서 상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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