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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요 3:16)

성탄절이 다가왔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성탄절의 전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구제불능이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 보내어주셨다. 이러한 우리의 구제불능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면, 성탄절을 이해할 수 없다.

누군가 나의 배를 칼로 자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나의 배를 칼로 자르는 사람을 고마워하고 심지어 돈을 경우도 있다. 그것은 내가 병에 걸렸을 때이다. 나의 배를 자르고 암 덩어리를 제거해주는 그 의사에게 고맙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내가 건강하고 아무런 질병이 없다면, 결코 의사라 해도 나의 배를 가르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가 심각한 영적인 질병에 걸려 도무지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구제불능의 상태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성탄절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다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다(눅 5:31-32).

이 세상에는 완벽하고 흠 없이 거룩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도 알고 보면 모두 다 흠 투성이였다.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아브라함도 믿음이 없이 행동했고, 위대한 일을 이루었던 모세는 교만한 죄에 빠졌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고 했던 다윗도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남편을 교살한 파렴치범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그럴듯하고 괜찮아 보이는 사람들도 알고 보면 여러 가지 단점과 흠이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믿었던 사람에게서 흠과 단점을 발견하거나 썩어 문드러진 모습을 보고 떠나 버린다. 다 썩었다고 욕을 해버리고 떠나 버린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죄악투성이이며 모순덩어리인 우리들을 보면서도 비난해버리고 떠나 버리시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더욱 사랑하셨다. 그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다. 최근 서울의 어느 마을에 다음과 같은 현수막이 걸렸다고 한다. “xx동에 쪽방촌이 웬 말이냐?” 그 마을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쪽방촌을 세운다는 계획을 알게 된 주민들이 들고일어나 붙인 현수막이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그들이 쪽방촌이 들어오면 집값 내려간다고 붙인 것이 틀림없다. 그 불쌍한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천국에 “자격 없는 자들은 천국에 못 들어온다”라고 써 붙이지 않으셨다. 오히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해주시겠다고 하셨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다. 어쩌면 하나님의 사랑은 산타클로스를 가장한 부모님의 사랑과 같다. 울면 선물을 안 준다고, 나쁜 아이들에게는 선물을 안 준다고 하는데, 선물을 안 받은 아이는 한 아이도 없다. 심술꾸러기 못된 아이들도 다 받았다. 그것은 산타클로스가 바로 그들의 부모였기 때문이다. 자격이 없어도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에 가장 큰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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