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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 속에 감추어진 축복(창 3:15)

성경은 하나님의 연애편지이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깊이 묵상해보면 한 구절 한 구절이 하나님의 사랑 고백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송이꿀 보다도 더 달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행위도 사랑의 행위이다. 하나님의 행위는 그 어떤 것도 사랑의 동기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 점에서, 선악과를 주신 것도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신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그 선악과를 먹고 타락했고 그로 인하여 비참한 결과를 얻게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질문을 던진다. 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만들지 않았더라면, 타락할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러한 질문은 아주 잘못된 질문이다. 운전하다가 교통신호를 어겨 크게 사고가 났다면, 자동차 회사를 향해서 왜 이런 자동차를 만들었느냐고 항의할 수 없는 것처럼, 선악과를 잘못 사용하여 타락한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것은 우리가 거절할 자유가 있을 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참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말을 전혀 거역할 수 없고 100% 순종하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로봇을 보면서 사랑에 빠질 사람이 있겠는가? 참사랑은 거절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불순종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때,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사랑이 참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제하여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게 만드시려면 만드실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마치 아무 처녀든지 지목하여 수종을 들라고 명령할 수 있는 왕이 궁중의 한 시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달라고 애걸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강제적으로 부수고 들어오시지 않고 문을 두드리면서 우리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셨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 대신 선악과를 선택했다. 거절할 수 있는 자유가 없는 물질에 불과한 선악과를 하나님 대신 선택한 것이다. 그것이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졌고, 선악과는 약속한 행복을 줄 수 없었다. 그게 우상을 선택한 비참한 결과일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범죄한 인간을 향해서 심판을 선포하셨다. 남자에게는 땀을 흘려 노동하는 저주를, 여자에게는 고통 가운데 잉태하는 저주를, 뱀에게는 땅에서 기어 다니는 저주를 선포하셨다. 하지만 그 저주는 저주만이 아니었다. 마치 자녀가 잘못했을 때 “집을 나가”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냐”라고 외치지만, 부모에게서 자녀에 대한 사랑이 끊어질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 저주 속에 축복을 숨겨놓으셨다. 즉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뱀의 후손의 머리를 부술 것이라는 예언이 들어 있었다. 이것을 원시복음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하던 바로 그 순간부터 구원을 위한 계획을 세우셨던 것이다.

성탄절을 그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에 따라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탄절을 앞에 둔 이 시기에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해야 하고,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놀라운 기쁨의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율법은 아무나 전할 수 없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않으면 전하는 힘이 없다. 하지만 복음의 기쁜 소식은 누구나 전할 수 있다. 나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오신 주님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구원의 주로 오셨다는 기쁨의 좋은 소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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