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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넬의 죽음(삼하 3:22-39)

아브넬은 뛰어난 용사였다. 이런 아브넬이 다윗과 함께 유다 나라를 위해 일한다면 유익한 일이 될 수 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아브넬은 뛰어난 용사였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면서 자신의 탐욕을 추구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다윗에게 투항하여 다윗의 왕국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가 이스보셋을 앞세우면서 악행을 저질렀던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으로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경우에 따라 선한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경우에 따라 악한 도구로도 사용될 가능성이 충분히 많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있는 단점을 보고 그 사람을 내치는 것은 옳지 않다. 요압 장군의 입장이 그랬다. 요압은 아브넬을 믿지 못했다. 그는 간첩이며 다윗에게 온 것은 속임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아브넬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을 배제하기 시작한다면, 그 누구와도 같이 할 수 없을 것이다. 바람직한 태도는 비록 약점이 있다 하더라도 포용하고 함께 하려는 자세이다. 다윗은 비록 아브넬에게 악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런 사람도 함께 포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점이 사울과 다른 점이었다. 사울은 다윗을 보면서 악한 면만을 보았다. 그리고 다윗을 제거하려고 했다. 장점을 보고 포용했더라면 훨씬 더 유익했었을 텐데 말이다.

요압이 이러한 태도를 가진 이유는 아브넬이 그의 동생 아사헬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아브넬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압은 그런 개인적인 원한을 말하지 않고, 아브넬을 간첩으로 몰았다. 마치 다윗의 왕국을 위해서 아브넬을 없애는 것이 유익인 것처럼 말한 것이다. 속마음이 다르고 표현이 다른 게 사람이다. 속에는 악한 생각이 있는데, 겉으로는 그럴듯한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분별해야 한다. 교회나 단체에 요압과 같은 사람들이 많다. 그럴듯한 말을 하는데, 속으로는 다른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지혜롭게 분별할 필요가 있다.

요압은 결국 아브넬을 죽였다. 다윗은 미처 손도 쓰지 못하고 있을 때, 요압은 아브넬을 죽였다. 악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한 것이기에, 아브넬을 죽이는 데까지 실행에 옮기는데, 다윗은 미처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해서 아브넬을 잃고 말았다. 그게 인간 왕의 한계였다. 사울만 실패한 왕이 아니라, 다윗도 결국 보호하지 못하는 어설픈 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사람에게 둘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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