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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애가(삼하 1:17-27)

사울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너무나도 슬퍼하였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이다. 어떻게 자신을 괴롭히던 원수의 죽음 앞에서 슬퍼할 수 있을까? 그것은 사랑의 마음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 마치 부모의 사랑을 거부하고 대들던 망나니 같은 아들이 조폭과 어울려 다니다가 죽었을 경우, 그 부모는 그 죽은 아들을 보면서 속 시원해하는 것이 아니라 애통해하는 것과 같다. 사랑이 있다면, 애통해할 수 있다. 다윗은 애가를 지어부르면서 슬퍼하였다.

우리 주변에서도 영적인 전투에서 쓰러져 죽는 사람들을 만난다. 마치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죽게 된 것처럼, 우리들은 영적인 전투의 현장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 과정에서 치명상을 입고 쓰러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우리는 그 쓰러진 사람을 보면서 비난하고 통쾌해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애통해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넘어진 자들을 보면서 너무나도 쉽게 비난한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은 바른 반응이 아니다(마 7:1-5).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창기들을 보면서 가졌던 반응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빌 2:1-4). 우리도 똑같이 쓰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사람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님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왕이며 용사였던 사울과 요나단이 쓰러지는 게 현실이다(삼하 1:19). 아무리 그들이 뛰어나도 결국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참되신 왕이신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음을 기억해야 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

더 나아가 소문을 낼 것이 아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죽음의 소식을 블레셋의 딸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삼하 1:20). 시적인 표현이지만, 오늘날에도 맞는 말이다. 우리들은 교회 내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우리의 옳음을 주장하기 위해서 세상 법정으로 너무 쉽게 달려간다. 시위하면서 떠벌리기도 한다. 성경의 가르침(고전 6:1-7)과는 정 반대로 말이다.

왜 우리는 이런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쓰러진 모습을 보고 통쾌하게 생각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애통해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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