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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눅 24:36-49)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제자들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면서도 믿지 못했고, 그들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도 영이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예수님의 손과 발을 보고 기뻐하면서도 역시 의심하였다. 이게 꿈일까 생시일까 의심했다. 결국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실제로 음식을 드시는 것을 보면서 확신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인가? 아니면 너무 믿음이 없는 것인가? 우리는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경험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믿지 못하고 또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확실하게 믿을 만 할 때까지 의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책망하셨다. 어찌하여 두려워하고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제자들의 의심이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왜 의심이 잘못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사실이고, 우리가 믿지 말아야 할 것은 거짓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의 진짜 부모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면서 정말로 확신이 들 때까지 계속 의심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의심하기보다 부모님의 품 안에서 사랑을 누리는 것이 옳은 것이다. 하지만 유괴범이 와서 온갖 감언이설로 꾀일 때에는 계속해서 의심을 해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늘 거꾸로 한다는 점이다. 믿어야 할 대상은 자꾸만 의심하고, 믿지 말아야 할 것들은 너무나도 쉽게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믿어야 할 것은 믿어야 하고, 의심해야 할 것은 의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부부간의 사랑은 확인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해야 하는 것이다. 의심을 통해서 확신에 이를 수는 없다. 의심은 계속해서 불신을 조장할 뿐이다. 가정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의심하는 것이다. 선한 의도가 아니라 어떤 악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면 반드시 무너진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악의 길로 걸어갔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의심하지 않으셨다. 저것들이 혹시 사탄의 자녀들이 아닐까 하지 않으셨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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