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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에게 베푼 은혜(왕하 6:18-23)

흔히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구약의 하나님은 잔인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마르키온이라는 사람은 구약은 내버려야 하고 신약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구약을 보면 사랑의 계명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잠언 25:21-22에서는 원수를 갚지말고 오히려 그에게 사랑을 베풀 것을 가르치고 있으며, 레위기 19:18에서도 이웃 사랑하기를 자신의 몸과 같이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원수를 갚지 않고 오히려 용서해주었다. 다윗의 경우가 그랬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 했고, 시므이는 다윗을 비난했고, 압살롬도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다윗은 모두 용서하였다.

원수를 만들지 않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원수가 생겨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현상이다.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경우를 만나게 된다. 마치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는 것처럼, 우리가 살다보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는 원수들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다. 다윗은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아야 할 일을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국가를 위해서 싸웠고 승리를 했다. 하지만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너무나도 억울할 것이지만, 다윗은 오히려 선으로 사울에게 갚았다.

물론 다윗이 쓴 시편을 보면 원수를 저주하는 내용의 시가 나온다. 예를 들면, 시편 109편에서는 원수를 저주하는 내용의 기도가 있다. 이런 시편들을 가리켜 저주의 시편이라고 한다. 이렇게 저주의 시편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기도란 정답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적어도 이런 저주의 기도를 통해서 다윗은 자신의 손으로 원수를 갚지는 않겠다고 한 것이다. 원수 갚은 것을 하나님께 맡겨버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아람 나라가 이스라엘을 침공하러 왔지만, 엘리사 선지자가 기도하여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였고 결과적으로 그들을 사마리아 성으로 인도하여 사로잡게 되었다. 그때 이스라엘의 왕이 그들을 죽이길 원했다. 그때 엘리사는 죽일 것이 아니라 잘 대접해서 돌려보내라고 권고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다시는 이스라엘을 침공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좋은 결과가 항상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혹시 오히려 안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용서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말이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갚을 것이 아니라 용서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말로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면서 실제로는 원수들에게 눈꼽만큼의 여유도 보이지 않는다. 동성애자들의 집회에 가서 분노를 쏟아내고 인분을 던지거나, 이단들이 나타나면 분노하고 악하게 대하고, 교회 내에 분쟁이 일어나면 조금도 양보를 할 줄 모른다. 진리를 사수한다는 명목하에 말이다. 이것은 심히 잘못 되었다. 우리의 마음에 원수를 향해 분노가 치솟아 오를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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