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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추격, 하나님의 보호(삼상 23:6-14)

다윗이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하였다는 소식이 사울에게 전해졌을 때, 사울은 기뻐하였다. 그일라는 성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문만 걸어 잠그면 빠져나갈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울은 군대를 이끌고 다윗을 잡으러 갔다. 그일라 사람들이 블레셋의 침공을 당했다는 소식에는 움직이지 않았던 사울은 다윗을 잡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그때 사울은 말했다.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사울의 이 말은 잘못된 말이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에게 넘기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신앙적인 용어를 써가면서 사울은 이 상황을 해석했다. 하지만 아무리 신앙적인 용어를 썼다 할지라도 사울은 철저하게 신앙적이지 못했다. 우리는 신앙적인 용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우리 주변에서는 신앙적인 용어를 쓰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등등의 표현을 자주 쓰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 그 사람이 신앙적인 사람임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떤 영적인 파워를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굴복시키려는 악한 의도에서 사용하는 경우도 많고,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신앙적인 용어를 쓰는 경우가 많다. 사울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우리는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주변에서 신앙적인 용어를 남발하면서 은근히 자신이 영적인 사람인 것처럼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은 똑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기회를 준 것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씩이나 주어졌고, 다윗의 사람들은 지금이야말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다윗은 그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았다. 이러한 다윗의 태도는 사울의 태도와 묘하게 대조된다. 일이 잘 풀려나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객관적이고 분명한 증거는 아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하려 할 때 마침 욥바 항구에 배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보호하셨다. 그리고 사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때 사울이 깨달았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지 않으셨음을 알아야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사울은 이때 그냥 지나갔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따지지도 않았다. 이것이 다윗과의 차이점이다. 다윗은 좋은 일이 있을 때에나 힘든 일이 있을 때에나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따졌다. “하나님, 왜 나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과 달리 움직이시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게 아쉽다. 사실은 이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사울에게 주고 계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을 통해서라도 회개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다시 은혜를 베풀어주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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