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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문자로 성경의 정신을 죽이지 말아야

사도 바울이 만일 2020년도에 설교했다면 이렇게 설교했을 것이다. “여러분, 마스크를 쓰십시오. 그것은 이웃을 배려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개인의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를 해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나의 자유를 제어하는 일에 기꺼이 동참하겠습니다. 마스크를 쓰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마스크를 벗는 것은 마치 나체로 돌아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설교집이 수백 년 후에 교회 내에서 읽히게 될 때, 어떤 문자 주의자(바리새파 교인)들은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마스크를 써야 신앙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했던 바울의 말의 배경도 무시한 채, 그저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말을 금과옥조로 내세우며 예배를 드릴 때 반드시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그런 황당한 논리가 승리할 것이다. 이제는 팬데믹 상황이 아닌데도 말이다.

성경을 연구할 때, 바울 사도가 처한 상황과 그 편지를 받는 교회의 상황을 고려함 없이 문자적으로만 성경을 읽는 위험은 적지 않다. 성경의 문자로 성경의 정신을 훼손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그 옛날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라고 했기 때문에 아주 충실하게 제새를 드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사 1:11-14)고 하셨다.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면 용서해주시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는 마음 없이 그저 제사만 잘 드리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다윗은 범죄한 후에 그냥 제사만 드리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심령을 원하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다. 문자적으로 아주 철저해서, 심지어 무시해도 될만한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까지 드렸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칭찬하지 않으셨다. 그들에게는 율법의 더 중한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자적으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한편으로는 바람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마음과는 거리가 먼 것일 수 있다. 아내에게 다정하지 못한 남편을 향해서 집에 오면 설거지 좀 해주고 그래 달라고 부탁하면, 남편이 설거지만 해주고 “설거지 다 했어, 됐지?”라고 말하면 0점짜리 남편일 것이다. 아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좀 더 자상하고 아내와 함께하고 아내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을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종종 성경에 기록된 문자에만 함몰된 채, 그 문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반대되는 행동을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에는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옛날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길을 반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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