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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승리와 십자군의 실패

세상은 진리에 호의적이지 않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빌 2:6). 참 빛이 되신 예수님께서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요 1:11). 오히려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적했다. 다친 다리를 치료해주려고 시도하는 순간 그 수의사의 손을 물어버리는 강아지처럼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했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적할 때, 예수님은 참으셨다. 그렇게 참으신 것은 대적하는 자들을 물리칠 힘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당장이라도 열두 군단보다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할 능력이 있었다(마 26:53). 하지만 예수님은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막은 사마리아인들을 향해서 저주를 퍼붓지 않으셨다. 오히려 사마리아 사람들을 향하여 화가 잔뜩 나 있는 제자들을 꾸짖으셨다(눅 9:51-56).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베드로는 칼을 들고 저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칼을 도로 집어넣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은 무참히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불과 몇 년 만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시아를 넘어서서 유럽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고, 약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십자가의 길은 실패의 길처럼 보였지만, 그 길이 승리의 길이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 천년이 지난 후 그래서 유럽이 기독교 국가였을 때, 사람들은 십자군 운동을 일으켰다. 팔레스타인 땅을 이슬람교도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불편하게 여긴 사람들이 그 성지(聖地)를 되찾겠다는 발상이었다. 그들은 이슬람 교도들과 싸울 수 있는 충분히 능력이 있었다. 기독교도는 이제는 더 이상 소수가 아니고, 유럽 전체가 기독교도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십자군은 이슬람교도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십자군 전쟁이다. 그런데 이 전쟁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전쟁을 도와주지 않으셨던 것이다.

사실 십자군 전쟁은 영적인 대적을 물리치고 성지를 회복하자는 슬로건을 가지고 시작된 것이었지만, 그 전쟁은 전혀 영적이지 않았다. 즉 거룩한 것이 아니었다. 일반 성도들은 순수한 신앙적 열정으로 참여한다고 했겠지만, 그 전쟁을 일으킨 지도급들의 마음속에서는 세속적 탐욕의 동기가 들어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후추의 주 생산지인 인도로부터 유럽으로 통하는 육상 운송로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런데 당시의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이 합력하여 신앙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아무튼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그 옛날 이슬람교도들을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던 사람들과 비슷하게 생각하거나, 비슷하게 일반 성도들을 충동질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성애자들, 좌파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둘, 또는 이슬람 교도들이 우리들의 영적인 대적이며, 이들을 다 몰아내는 것이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성시화(聖市化)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예수님은 적대세력들을 몰아내고 대적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십자군의 길을 가시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사실 우리의 대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싸움은 외부의 적을 물리치는 데 있지 않고, 우리를 영적으로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유혹과 싸우는데 있다(엡 6:12). 사탄은 우리를 탐욕으로 얼룩지게 유혹하고, 또는 음란한 마음을 품게 하며, 이기적으로 살아가도록 유혹한다. 또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살지 말고, 이 세상의 돈이나 권력을 의지하며 살라고 유혹한다. 우리는 그러한 유혹과 맞서 싸워야 한다. 그게 우리가 싸워야 할 영적인 싸움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칼을 꺼내 들고 세상을 향해서 우리의 힘을 보여주려고 한다. 마치 칼을 빼들어서 말고의 귀를 잘라버린 베드로처럼 말이다. 칼은 힘이 있어서 귀를 자를 수 있었다. 하지만 칼은 더 큰 칼을 당할 수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병정들의 칼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 했고, 도망가야 했다. 오늘날 우리들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결집된 힘으로 이단 또는 동성애 옹호 기업의 불매운동을 통해 굴복시켜보려고 한다. 오늘날 우리들은 시위의 방법으로 우리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한다. 우리들의 숫자가 200만이니, 300만이니 과장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칼의 능력은 이 세상이 더 크다는 사실을 곧 발견하게 될 것이고, 십자군 전쟁이 실패했던 것처럼 실패할 가능성이 많다. 우리들이 가진 칼로는 아무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발생하게 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길이 있다. 십자가의 길은 지는 것 같았으나, 사람들의 마음을 정복했다. 우리는 실패했던 십자군의 길을 따를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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