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이것까지 참으라 (눅 22:47-53)

2021년 3월 21일 주일예배 설교

이제 고난 주간과 또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절을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셨던 그 말씀들을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가롯 유다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군병들을 이끌고 와서 예수님을 체포하는 것을 도와주는 그 이야기를 읽을 수가 있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서로 입맞춤으로써 인사를 했는데요. 남자들끼리 어떻게 입 맞추면서 인사를 했는지는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마는, 아무튼 그 당시에 서로 입맞춤을 해서 문안을 하고 서로 반갑다고 하는 인사를 하곤 했었는데, 가롯 유다는 그 반가움의 인사 입맞춤의 인사를 통해서 자신이 데리고 왔던 그 군병들에게 예수님을 잡으라고 하는 암구호로 그 신호로 사용하게 됐습니다.

깜깜한 밤중에,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다 잠자리에 들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는 그 시간에, 이 가롯 유다와 군사들이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그 한밤중에 쳐들어와서, 그리고 그 깜깜한 칠흑 같은 밤에 예수님을 특정하고, 그리고 예수님을 잡아가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기록돼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참 주님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이 사람들의 열정이 참 특심하다. 열심히 대단하다고 하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지금 이 시간이 언제냐 하면, 한밤중이에요. 당시 사람들은 저녁만 먹으면 잠자리에 드는,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는 다들 곯아떨어져 있을, 아주 피곤하고, 정말 아무것도 일하기 싫어하는 바로 그 시간인데, 그 시간에 가롯 유다와 군병들이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한밤중에 예수님이 있는 곳을 찾아가서 거기서 예수님을 체포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참 악을 행하는 자들의 열정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정말 뜨거운 열정이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사장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민란을 일으키지 않고 예수님을 체포해서 처리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하는 것인데요. 그래서 조용히 예수님을 처리하기 위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그 밤중에 가롯 유다를 매수 해서 예수님을 체포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잠을 자고 있던 그 시간에, 예수님이 어디서 기도하는지, 미리 정보를 가지고서 예수님을 잡으려고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그 열정이 참 대단하고 세밀하고 구체적이고 최선을 다하고 있구나 하는 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하고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는 왜 그런 열심이 없는지 모르겠어요.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고, 주의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왜 그렇게 나약하고 아무런 의지도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시기를 내 심령이 죽을 것 같았다고 말씀하시면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 기도 좀 하자 그랬는데, 그 순간에 제자들은 그냥 쿨쿨 잠만 자는 겁니다. 주의 일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길에는 조금만 피곤해도 잠을 자버리고, 정말 선을 행하는 그 일 가운데는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면 멈춰버리고, 주를 위해서 헌신하다 하다가도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비난하는 것 같으면, 그 자리에서 중단해 버리고,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멈추어 버리는데,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멈출 줄을 모릅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될 때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일에는, 조그마한 어려움이 있으면 다 멈춰버리면서, 악을 행할 때는 남을 죽이고 비방하고 쓰러뜨릴 때는 멈출 줄 모르는 그 사악한 모습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데 비가 오면 못 가겠다 말하고, 코로나가 있으니 그냥 말지 뭐 그러고, 오늘은 좀 피곤하니까 그냥 쉬지 그러고, 사람들이 내게 대해서 안 좋은 말하고, 나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 것 같으면, 그냥 포기해버리고 주를 위해서 헌신하자고 하면 아무런 반응이 없는데, 나쁜 일을 하자고 하면 악을 행하는 일을 하자고 하면 내 돈 써가면서 열정적으로, 안 되는 것 같으면 일을 만들어가면서 악을 행하는 그런 악한 모습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들의 연약한 모습인데,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우리가 선한 일에 열정을 내게 해 주옵소서. 악의 길로 달려가기보다는, 사랑하는 일에 달려가게 해 주옵소서. 나쁜 일에 열정을 내기보다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내가 열정을 내어 따라가게 해 주옵소서. 사람들이 비난하고 욕하고 나를 행해서 박해하면 그 자리에서 멈춰버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소멸되지 아니하도록, 주님을 사랑하는 그 열정이 소멸되지 아니하도록, 저를 보호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할 때, 주께서 우리를 불러주실 때, 딴 곳을 바라보며 내 이야기가 아닌가 하면서, 그냥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름의 상을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가 되게 해 주옵소서. 우리가 이번 한 주간 동안 지나는 가운데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에게 입을 맞추니까, 군병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달려들었습니다. 갑작스럽게 군인들이 나타나고, 그리고 그 군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는 그 순간에 정말 다급한 순간에 제자들은 당황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 가운데 한 제자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칼을 빼들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말씀 가운데서는 그 제자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 칼을 맞은 자가 누구였는지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요한복음 18장 10절 말씀에 보면 그때 칼을 빼 든 사람은 베드로였고, 그리고 그때 귀가 잘려 나간 사람은 대제사장의 사환이었던 말고의 귀가 잘려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순간에 정말 긴박한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을 보호해야만 하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에 밀리면 끝장이고, 지금 이 순간에 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간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계획했던 것,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이루어놓았던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하는 그런 열정 때문에, 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호하고 예수님의 사역을 보호하겠다고 하는 그 열정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칼을 빼들어서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를 향해서 해주셨던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의외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서, “고맙다. 너밖에 없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향해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잘려나간 귀를 만져 그 사람의 귀를 낮게 해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 고난의 주간을 맞이하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셨던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일어날 때, 예수님께서 해주셨던 이 말씀, “이것까지 참아라.” 하신 그 말씀을 우리가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옳고 내가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이 되면 칼을 빼어 들기가 쉽습니다. 지금 내가 정당한 사람의 편에 서 있고, 상대방이 악하다고 생각이 든다고 하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내가 저 악한 사람들을 물리치는 것이 옳고 그렇게 악한 사람들을 제압하는 것만이 정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사람들은 화를 내는데요. 사람들이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이 나빠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분노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분노의 그 근원에는 “옳기 때문에” 분노하는 겁니다.

잘못된 것을 참을 수가 없는 겁니다. 나쁘게 돌아가는 것을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잘못된 것을 참을 수가 없고, 나는 옳고 정당하기 때문에 화를 낼 수밖에 없는 것인데요. 종종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갑질이 왜 문제가 되고 있습니까? 갑질이라고 하는 것들이 왜 나타납니까? 그것은 내가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하는 그러한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백화점에서 내가 충분히 낸 돈에 비하여서, 내가 그의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폭발하게 되어 있는 것이고요. 내가 세금도 냈고 내가 국민으로서의 모든 것을 다 잘했는데, 공무원들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갑질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칼을 휘두르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금 옳지 않은 일을 상대방이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의고 예수님은 선한 분이시고 예수님의 사역은 정말 옳은 사역인데, 이 예수님을 잡아가려고 죽이려고 하는 저 제사장의 군병들이야말로 악한 무리들이고, 저 악한 무리들을 제압하고, 칼을 쓰든 무슨 방법을 쓰든 제압하는 것이야말로 이것이 정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네가 잘했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칼을 도로 칼집에 넣으라.” 말씀하시고,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이 순간에, 우리가 악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만 선히 이길 수 있고, 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악과 겨루어서, 싸워서 이겨야만 선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반대의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에서부터 20절 말씀에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우리는 성을 내고 분을 내고 칼을 빼어 들어야 하나님의 정의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화를 내는 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 우리에게는 영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적인 싸움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영적인 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악한 세력과의 싸움인데요. 어떻게 우리는 영적인 싸움에서 악한 세력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싸움이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아닌 상대방이 악한 세력이고, 저 악한 세력을 싸워서 물리쳐 이겨야만, 그런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오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의 생각이 바로 그런 생각인데요. 예수님을 체포하는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이고, 악당들이고 저 악당들을 우리가 물리쳐야 우리가 영적인 싸움에서 이긴다고 생각했고, 저 악당들을 물리치는 방법으로 칼이라도 빼어 들어서 이겨야, 그래야 선이 이긴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영적인 싸움은 무엇이냐면, 우리 의부에 있는 적과 싸우는 것이 영적인 싸움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적이 어디에 있냐면 우리들의 마음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탄의 유혹이 있는데, 그 유혹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영적인 전쟁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사탄은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면서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우리를 자극합니다. 화를 내라. 지금 싸워라. 저 상대방과 싸워서 이기라고 우리를 자극하고 있는 사탄의 유혹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사랑하기보다는 미워해야 할 것이고, 포용하기보다는 혐오해야 될 것이고, 그래서 자꾸만 저 외부에 있는 적들과 싸우라고, 우리를 충동질하는 사탄의 생각이 있는데, 그 사탄은 종종 우리들에게 정당한 이유를 대면서 무너뜨리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베드로의 마음 가운데 들어 있는 그 생각이 바로 그 생각입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충동질하는 겁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저 악당들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그렇게 베드로에게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사탄의 시험을 받았는데요.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사탄이 예수님 앞에 짠하고 나타나 가지고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돌로 떡을 만들어보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리고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리고 내게 경배하기만 하면 이 세상을 주겠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그렇게 이해하고는 합니다. 물론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탄의 유혹은 그렇게 내 앞에 서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런 유혹입니다.

40일 내내 금식하셨던 예수님의 마음 가운데서 그 마음속에서 예수님을 자꾸만 충동질하는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지금 배고픈데, 네가 하나님의 아들 아니냐? 네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이용해서, “저 돌들로 떡을 만들어 먹어 보아라.”라고 하는 그 유혹이 마음속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거예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드러내라.”라고 하는 그런 유혹이 예수님의 마음 가운데서 솟아오르는 것이에요.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보다는 내가 사람들에게 짠하고 나타나서, 그냥 영광을 받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이 솟아오르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에 그 유혹과 욕망들을 무찌르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영적인 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외부에 있는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내부의 적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종종 영적인 싸움을 내 안에서의 싸움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의부의 적과의 싸움으로 그렇게 규정하면서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영적인 일이라고, 그렇게 잘못 가르쳐 왔고, 그리고 그렇게 속아 넘어간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지금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이단 세력들이 있는데, 그 이단 세력들을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이단들을 완전히 다 잡아서 화형을 시켜야만, 마녀 사냥을 해서 그 사람들을 죽여버려야만 하나님 나의 나라가 이루어질 거라고 하는 그런 생각으로 이단들을 잡아 죽이는 그런 일들이 교회의 역사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저 예루살렘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그 예루살렘 성지가 이슬람 이슬람 회교도들에 의해서 장악당하고 있는데, 우리가 군인들을 일으켜서 저 이슬람교도들을 다 쫓아내고 성지를 탈환해야 영적인 승리를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부추겨서, 십자군 전쟁을 하게 만든 역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 공산당들을 물리치고 저 공산당들은 다 죽여버리고 다 쫓아내 버려야, 저 사람들은 완전히 빨갱이들은 죽여버려야, 그래야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동성애자들을 다 물리쳐버리고, 특별히 교회를 박해하는 정권들을 다 쫓아내 버려야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공산당이 좋다고 말씀드린 것도 아니고, 동성애를 해도 괜찮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괜찮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진정한 영적인 싸움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적이 어디에 있냐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자꾸만 넘어뜨리려고 하는 그 영적인 유혹의 세력이 우리가 싸워 나가야 할 진정한 영적인 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외부에 있는 적들이 무엇입니까? 외부에 있는 적들이 있어서 우리를 핍박하고 박해한다고 한다면, 성경의 가르침은 그들과 함께 싸워서 그들을 박살 내고,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해서 우리가 이겨야 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에서는 그러한 박해를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절 12절의 말씀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누군가 박해하면 맞서 싸울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이 순간에 칼로 싸워서 이기는 것이 그것이 믿음을 지키는 것이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주님께서는 그 순간에 이것까지 참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은 외부의 공격을 통해서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미움을 일으켜서, 우리가 싸우고자 하는 마음 호전적인 마음을 가지고 만들어서, 사탄의 자녀로 우리를 만들어 버리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고, 하나님을 보는 자,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화평하게 하는 것인데, 화평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밥 먹어주지 못하는 것이니, 우리가 적대적이고, 싸워서 저들을 상대방을 무찔러버려서 영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영적으로 승리하는 것이라고 하는,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탄의 말에 굴복해 버리는 일들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언제 악마가 되는가?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할 때 악마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내가 정의의 편에 서 있는 순간, 우리는 칼을 빼어 들게 되어 있고, 베드로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인 것입니다. 나는 정의를 위한다고 하는 그 순간에, 내 손에는 칼이 들려서 악한 저 사람들과 똑같은 악의 방법을 쓰면서, 나는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그런 착각을 만들어 불러일으키는 것, 그런데 그것이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악을 이기셨는가? 악으로 악을 이긴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둠이 어둠을 물리칠 수는 없어요.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어둠이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빛을 비출 때 어둠이 물러가는 것이고, 미움이 사랑을, 미움을, 미움이 미움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만이 미움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는 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십자군의 길을 따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군의 길은 복음이 아니에요. 그것이 정확하게 악마의 길이고, 악으로 악을 이기려고 하는 그런 잘못된 생각이고, 십자군의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셨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질문을 던질 겁니다. 목사님 억울한 순간에, 억울하게 당할 때, 의가 박해를 당할 때, 믿음이 박해를 당할 때, 대항하지도 못하고 보복하지도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러다 망하면, 망하는 거 아닙니까? 베드로의 생각이 바로 그런 생각이었는데요. 우리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영원히 악이 승리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고, 나쁜 사람들, 포악한 사람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을 바로잡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옳은 방법으로 해결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그 주권 하에 엎드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원수를 대적할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봉 5장 39절의 말씀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악한 자와 싸워라가 아니고,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내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의 말씀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칼 들고 가서 싸고, 목을 따라가 아니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축복해주고”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도를 많이 닦는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열정을 가지고 사랑해 주셨어요. 조그만 비가 오면, 아, 안 되겠다. 날씨만 더우면, 아, 안 되겠다. 조금만 몸이 찌뿌둥하면, “아, 안 되겠다.”라고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선 우리를 사랑하셔서 저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낮은 땅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원수를 갚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어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해주시는 말씀이, “이것까지 참으라.” 말씀하실 때, 주님의 말씀에 우리가 귀를 기울이며,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는 그런 사탄의 요구를,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쩌면 나약하게 처참하게 죽으셨습니다. 군병들이 와서 예수님을 칼로 제압할 때 힘없이 끌려가셨습니다. 채찍질할 때 힘없이 맞았습니다. 침 뱉을 틀 때, 수치를 줄 때, 그대로 당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받고 조롱을 할 때 그대로 당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부활하셨고, 우리를 살리셨으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승리하도록 초청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들에게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만일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만일 우리들에게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지금 이 순간에 칼을 빼어 들어야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기는,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며, 오늘 하루도 “이것까지 참으라.” 그 말씀을 매 순간순간, 힘들 때도 어려울 때도 억울할 때도 그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