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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교회 – 계시록 강해 3

일곱 교회 (계 1:20) 이국진 목사

인도의 성인이라고 불려지는 마하트마 간디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뭐라고 이야기했냐면, “나는 당신들이 믿는 그리스도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당신들 크리스천들은 싫어합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믿는 그리스도를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마트마 간디가 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아니면 다른 사람이 말을 했다고도 하는데, 누가 말했는가와는 상관없이, 그 말이 가지고 있는 그 말 자체가 사실 우리 성도들에게는 굉장히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이 말들을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많이 듣습니다. 예수님을 좋아하는데,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는 싫다”라고 하는 그런 고백들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듣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싶어서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는 데, 그래서 교회가 좋은 줄 알았는데, 교회에 정작 들어왔더니,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추하고 더러운 모습들, 그리고 썩어서 그 썩은내가 진동하는 모습들을 경험한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겁니다. 떠나면서 하는 말이,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 나는 예수님을 믿어요. 하지만, 교회는 다니기 싫습니다.” 어쩌면 우리 자녀들 가운데, 교회를 다니지 않는 그런 자녀들이 있는데요. 그 자녀들도 늘 하는 말이 이런 말입니다. “저 아직 예수님 믿어요. 저 아직 하나님을 믿어요. 그러나 교회는 다니기 싫어요.” 교회에서 더러운 모습을 경험하고, 성도들끼리 서로 싸우는 모습을 경험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교회가 싫어서 떠나 버리게 되는데, 그렇게 교회를 안 나가면서도 나는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나는 하나님을 믿지만, 교회는 나갈 수 없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요즘에는 “가나안 성도”라고 말을 합니다. 교회를 “안 나가기에” 그 “안나가”를 거꾸로 말하면, 가나안이 돼서, 가난한 성도라고 하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죠.

우리 주변에 그런 가나안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말하기를 사람들이 이렇게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신앙심이 없어서가 아니고, 신앙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서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정말 순수한 신앙을 오염시키는 암적인 존재로 생각되기 때문에, 정말 신앙을 순수한 신앙을 갖고 싶은데, 교회라고 하는 것이 마치 발암물질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교회를 다닐 수 없어서,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들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쩌면 우리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과연 교회가 무엇일까? 우리는 교회에서 무엇을 기대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현재 손가락질당하고, 비웃음 당하고, 조롱당하는 과연 교회에 어떤 소망이 있는가 하는 문제들을 우리가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지금까지, 한 2천 년의 역사 가운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그리고 교회가 세워지면서, 그 이래로 2천 년의 세월이 지내오는 과정 가운데, 교회는 부흥하기도 했고, 또한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기도 했었고, 또 타락하고 추락하는 그런 과정들을 겪은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가 타락하고, 그 타락이 심해질 때마다 나오는 구호가 하나 있는데요. 그 구호가 무엇이냐 하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고 하는 그런 구호입니다. 정말 이렇게 더럽고 정말 망가져버린 이런 교회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면서, 제발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간절한 소망들이 종종 들려지게 됩니다.

초대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초대교회에 대한 설명이 사도행전 2장 43절부터 47절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 정말 너무나도 좋은 교회였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교회였는데,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자신들의 물건을 나누어 주고, 함께 음식을 먹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즐거워하는 그런 복된 공동체, 사랑이 넘치는 그런 공동체였기 때문에,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타락할 때마다 간절히 바라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고 하는 그런 구호가 넘쳐나게 되고, 그런 갈망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엄격하게 따지면, 초대교회가 그렇게 멋있고 완벽한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좋은 이야기만 기록해 놓은 것이지만, 2장을 지나서 조금 몇 장 뒤로 가면, 이내 예루살렘 교회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단점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행전 5장에 가면 누구의 이야기가 나오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초대교회 구성원이었던 그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무슨 일을 했는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헌납했는데, 하나님께 드렸는데, 그 가운데 반절은 숨겨두고 마치 전체를 드린 것처럼 거짓말하는 사건이 벌어져서, 결국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한 이야기가 기록돼 있습니다. 그 이야기 가운데서, 왜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이런 일을 했는가에 대해서 이유를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서로 도와주고, 서로 사랑을 베풀고, 그러는 과정 가운데 아마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나도 이런 박수를 받아보고 싶다고 하는 그런 갈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물을 팔아 헌납하는, 그 모습 헌신하는 그 모습을 보고, 예를 들자면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나바를 향해서 박수하는 그 모습을 본,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우리도 그렇게 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박수를 받고 싶은데, 다 바치기는 싫은 거예요. 숨겨놓고 마치 다 바친 것처럼, 위선을 떨게 되는 그런 모습이 초대교회 가운데 있었던 것이고, 결국 그로 인해서 그 사람들이 결국 죽임을 당하는 그런 안타까운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 바로 첫 번째 교회였던 예루살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것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장 뒤로 더 넘어가면 사도행전 6장이 나오는데요. 사도행전 6장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교회 내에서 여러 가지 구제 사역을 하는 가운데, 차별이 있었다고 하는 거예요. 구제를 집행하는 분들이 있었는데, 이 구제를 집행하는 사도들이 구제를 집행함에 있어서, 유대인들에게, 다시 말하자면 아람어를 쓰는 유대인들에게 구제를 많이 해주고, 헬라어를 쓰는 유대인들은 그렇게 구제를 많이 안 해줬던 거죠. 당시 초대교회는 헬라어를 쓰는 유대인들과 아람어를 쓰는 유대인들이 같이 섞여 있는 그런 공동체였었는데, 사도들이 헬라파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모습이 성경에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교회 안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왜 저 사람은 도와주는데, 우리는 도와주지 않느냐? 서로 분란이 일어나서, 결국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문제로, 그 방법으로 일곱 명의 헬라파 집사님들을 세워서, 그분들로 하여금 헬라파 과부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해주는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 6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우리가 기대하기는 초대교회가 정말 아름답고 멋있는, 참 예수님의 정신에 따라서 행복한 공동체였을 거라고 우리가 추측을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고, 그 처음 세워졌던 바로 그 교회 내에도 여러 가지 문제와 아픔과 또 여러 가지 잘못된 부분들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이 완벽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라고 하는 곳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누굽니까?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죄성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바로 사람들인데, 마치 병원에 가면 건강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환자들이 다 모여 있는 것처럼, 교회라고 하는 것은, 거룩하고 완벽하고 정말 멋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가 아니라, 교회 자체가 허물이 많은 우리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에, 교회가 완벽할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을 찾아왔던 어떤 청년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여서 아마 여러분들이 수없이 많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청년이 찾아와서 정말 좋은 교회 정말 멋진 교회를 찾아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스펄전 목사님은 지금까지 자기가 수많은 교회들을 영국에 있는 교회들을 다 다녀봤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도 가봤고, 그리고 아주 모든 시설들을 잘 갖춰놓은 교회도 가봤지만, 그 어떤 교회도 완벽한 교회는 없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찾아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실망하면서 돌아가는 그 청년을 향해서 스펄전 목사님이 해 주신 말씀. “그런데 만일 자네가 그 완벽한 교회를 좋은 교회를 찾는다고 하면, 절대로 그 교회에 등록하지 말게.” 그렇게 부탁하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 청년이 물어볼 때, 스펄전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그 좋은 교회에 당신이 등록하게 되는 그 순간, 그 교회는 더 이상 좋은 교회가 될 수가 없다네.” 우리 인간들 나와 똑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그 교회는 완벽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아주 생생하게 들려주는 예화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들을 공동체 안에 불러주셔서, 신앙생활을 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만드는 것이죠. 그런데 이 교회라고 하는 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더러운 모습과, 그리고 악취가 나는 모습도 있고, 여러 가지 단점들이 많이 있는 그런 공동체일 수밖에 없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단점이 많은 교회로 사람들을 불러 넣으시는가? 사람들을 같이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영적인 성숙을 도모해 나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정말 더러운 모습을 보고, 여러 가지 좋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이런 더러운 꼴을 보지 않겠다고 하면서 교회를 떠나게 되면, 그것은 괜찮은 생각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신앙을 잃어버려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더러운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떠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그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닌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공동체로 불러주셔서, 공동체 안에서 성화의 길을 걸어가도록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완고한 부모님, 여러 가지 단점이 많고 성질도 많이 부리시는 그런 단점이 많은 부모님이라고 할지라도, 부모님의 곁을 떠나서 혼자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떠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마치 얼룩말이 서로 무리를 지어서 함께 있어야 안전한 것인데, 그 얼룩말 무리 가운데서 혼자 떨어져 나간 그 새끼 얼룩말은 결국 사자의 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가 비록 연약하고 단점들이 많이 있지만,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에서부터 떠나가게 된다고 하면,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탄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유진 피터슨이 했던 말을 소개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사랑은 고립된 채 존재할 수 없다. 타인과 동떨어진 경우, 그것은 자만심으로 변한다. 은혜는 홀로 받을 수 없다. 타인으로부터 단절될 경우 그것은 탐욕으로 변한다. 소망은 외로이 자랄 수 없다. 공동체로부터 떨어질 경우, 공상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그 어떤 은사 어떤 미덕도, 신앙 공동체를 떠나서는 건강하게 개발되고 유지될 수 없다.”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원칙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복수의 원리(principle of plurality),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원칙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복수의 원칙인데요. 혼자가 아니라 여러 명이 함께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나가려면, 한 사람이 결단하고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스템이면, 그 교회는 건강해질 수가 없습니다. 물론 한 사람이 결정하고 한 사람이 결단에 의해서 움직이게 된다고 한다면, 빨리 움직일 수 있겠고, 성장하기는 빨리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건강하게 만들어질 수는 없기 때문에, 사실은 교회에서 중요한 원칙이 무엇이냐 하면, 복수의 사람들이 함께 논의하고 함께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복수의 원칙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인데요. 어느 한 교회가 한 교회만 독립해 있다고 한다면, 좋은 교회로 갈 수가 없습니다. 잘못된 길로 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적인 원칙을 가장 잘 적용하고 있다고 하는 장로교 시스템은 무엇이냐면, 어떤 교회를 그냥 혼자 있게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교회들이 모여서, 노회를 이루고, 노회가 그래서 어떤 교회들을 돌보는 시스템으로 가야 그래야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죠.

그런데 노회라고 하는 것이 완벽한 곳이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경험해 보았듯이, 노회라고 하는 것이 사랑이 넘치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행복하고 좋은 곳이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거기에 가면 거기에도 악한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도 있고, 온갖 잘못된 것들이 많이 그 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런 복수의 원리가 적용되는 걸 통해서, 우리가 점점점점 발전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함께 결혼해서 함께 의논을 해야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가정을 이룬다고 한다면, 자녀가 부모님과 함께 논의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고, 복수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소아시아에 있었던 최초의 교회들 가운데 7개의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 말씀을 읽기는 요한계시록 1장 20절만 읽었지만, 예고드린 것처럼 오늘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그 교회들의 이야기들을 함께 살펴보면서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교회 오시기 전에 미리 2장 3장 읽어보라고 했는데, 읽어보고 오셨겠죠? 1부 때보다는 대답이 더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일곱 교회를 향해서 말씀을 해 주셨고, 그 말씀을 사도 요한으로 하여금 전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2장 3장의 내용이 길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다 살펴볼 수는 없겠고, 우리가 도표로 정리해보면 이렇게 정리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에베소 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예수비전교회가 있었는데, 아시죠?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었는데, 그 7개의 교회 가운데서 보면 칭찬을 받은 면도 있고, 책망을 받은 면도 있고, 그리고 그 교회에 대한 교훈과 그리고 그 교회에 대한 약속들이 요한계시록 2장과 3장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도표를 살펴본다면, 어떤 교회는 칭찬을 받지 못한 교회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죠?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어떤 교회는 책망이 없는 교회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죠?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가 있습니다. 각 교회 상황들에 대해서, 주님께서 그 교회 상황에 대해서 칭찬을 하시기도 하고, 또 책망하시기도 하고, 교훈과 약속을 주시는 말씀이 요한계시록 2장 3절에 기록돼 있는데요. 아마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은 오늘 집에 가서 다시 한번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 일곱 교회의 장점, 그리고 일곱 교회의 단점들을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데, 여러분 우리 교회가 어느 교회를 닮으면 제일 좋을까요? 어느 교회가 되고 싶습니까?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면 좋겠죠. (이제 없애도 됩니다.) 그래서 수많은 교회들의 이름을 조사해 보면, 우리 대한민국에 있는 교회들의 이름을 조사해 보면 서머나 교회라고 이름을 지은 교회도 있고, 빌라델비아 교회라고 이름을 지은 그런 교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전주에도 그런 교회들이 있죠. 그런데 어떤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면서, 라오디게아 교회로 이름 짓고 개척하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못 봤어요. 왜냐하면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을 받지 못하고, 책망만 받은 교회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교회 이름을 사용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 놀라운 사실이 한 가지 있는데, 이 교회들, 7개의 교회들 가운데서 어떤 교회는 칭찬만 받은 교회가 있고, 어떤 교회는 칭찬도 받고, 책망도 받은 교회가 있고, 어떤 교회는 책망만 받은 교회가 있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교회를 다 교회라고 인정해주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이죠.

사도 요한이 본 환상 가운데 무엇을 보았습니까? 일곱 개의 금으로 만든 촛대를 본 거예요. 그리고 금 초대가 무엇이냐? 교회다 그러는 거예요. 7개의 교회를 상징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서머나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가 너희들은 100점 만점이니까, 너희들은 교회 자격이 있고, 나머지 교회는 책망받을 것이 있으니까, 너희들은 교회 자격이 없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너희는 교회도 아니다. 순 엉터리다 하면서, 빵점짜리라고 처분해 버리고 끝내버리신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일곱 개의 모든 교회를 교회로 보고 계시다고 하는 것이죠. 교회로 보고 계시는데, 무슨 교회로 보고 있는가? 마치 금으로 만든 소중한, 그리고 촛대로서 빛을 발하는 교회라고 바라보고 계시다고 하는 것이 아주 놀라운 관점입니다.

그래서 요즘 피터슨 목사님은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교회는 모든 것이 엄선되어서 손님을 맞을 준비가 완벽하게 갖추어진 빅토리아 풍의 응접실 같은 곳이 아니라, 교회는 오히려 지저분한 거실과 같다. 어느 집에 사람이 불쑥 찾아 들어가면, 누추한 곳에 오신 것이 너무나도 송구스러워서, 아이고, 우리 누추한 곳에 오셔서, 몸 둘 바 모르겠다고, 사과에 사과를 해야만 하는 지저분한 것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그런 거실과 같은 곳이 교회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교회는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단점들이 많이 있는 것이고, 때로는 그 단점들이 아주 심각한 단점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이런 단점들이 괜찮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곱 교회의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시면서, 단점들을 지적하셨고, 그것을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걸 고쳐야 한다고 말씀해 주시죠. 괜찮다고 말씀하신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종종 어떤 반응을 보이냐면, 교회에 와서 단점을 보는 겁니다. 나쁜 걸 보는 겁니다. 이기적인 모습, 끼리끼리 노는 모습, 사랑이 없는 모습,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닫혀버리고, “교회란 이렇게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구나” 실망하면서, 그 교회 무리를 떠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그런 모습들이 있다고 해서 그 모습도 교회는 아닙니다. 마치 낚싯배가 바다로 항해를 하기 시작하면, 그 낚싯배에는 항상 갈매기들이 따라옵니다. 갈매기들이 따라오는 이유는 낚싯배에서 던져지는 그 물고기들을 먹기 위해서, 갈매기들이 따라오게 되는데, 아무리 그 갈매기가 그 배와 항상 같이 다닌다고 하더라도, 갈매기가 배가 아닌 것처럼, 갈매기는 배가 아니에요. 배는 그 배만 배인 것이지, 갈매기가 배가 아닌 것처럼, 교회 안에서 드러나고 있는 여러 가지 잘못된 모습들이 교회의 모습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때로는 그 잘못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목사라고 하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장로라고 하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그래서 그곳에 가면 썩은 내가 진동할 수도 있고, 못된 잘못된 모습들이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교회의 본질은 아니기에, 그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고 낙망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가지고 회개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런 결단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그 일곱 교회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그 말씀들을 쭉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 가운데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이 등장합니다. 여러분은 그걸 읽어보셨으면, 어떤 말이 반복된다고 하는 것을 느끼셨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께서 “내가 안다”라고 하는 말씀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성경책이 있으신 분들을 한번 보시면 좋겠는데요. 요한계시록 2장 2절에 보면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그랬어요. 3절 말씀에도 보면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랬어요. 9절 말씀에 보면,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알거니와” 그랬어요. 13절 말씀에 보면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그랬어요. 19절 말씀에 보니까,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그랬어요. 3장 1절 말씀에 보면 중간 정도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8절 말씀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그랬습니다. 그리고 15절 말씀에도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주님께서는 일곱 개의 교회를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불꽃같은 눈을 지니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추어진 것까지 다 살펴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시편 139편 1절부터 4절 말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잊게 하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겉으로만 봅니다. 말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어떤 분은 말하지 않고 제가 알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는 제 아내가 말하지 않아도 몰라요. 말해야만 겨우 아는 사람인데,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의 깊숙한 심령까지도 꿰뚫어 보고 계세요. 우리가 은밀하게 짓는 죄도 바라보고 계시고,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고 알아주지 않고 박수쳐주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서 있는 그 모습을 주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께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겉모습을 보고 우리를 무시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에, 그 주님 앞에 믿음으로 서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지난 성경 공부 시간에 어떤 분이 물어요. 목사님,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는데, 뭐 하려고 기도하나요? 그래서 제가 대답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누구랑 이야기하고 싶어요. 알아주는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잖아요?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아무 말도 못 알아듣는 바윗덩어리라고 하면, 얘기할 만나 마음이 생기겠어요? 내 앞에 있는 존재가 나무 둥치여서, 아무리 말해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나무 둥치라고 한다면, 그 앞에서 말하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내 사정을 잘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하고는 이야기하고 싶어요. 마음이 풀리는 거예요. 홀아비 사정은 누가 알아줘요? 과부가 알아줘요.

오헨리 단편집에 보면 <신경통>이라고 하는 단편 소설이 나오는데, 어느 강도가 어느 집에 들어가서 손 들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손을 못 들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왜 손 들라는데, 손 안 드냐고, 그렇게 협박을 하니까 하는 말이, 제가 신경통이 있어서 손을 못 들어요. 그러니까 그 강도가 하는 말이, “이런 제기랄, 내가 신경통이 있어서, 나도 강도 짓하고 있는데, 당신 언제부터 신경통이 걸렸어? 신경통에 무슨 약이 좋소?” 하면서 둘이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멋졌게 헤어졌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알아주는 자 앞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지, 아무것도 몰라주는 사람하고는 이야기하기가 싫은 것이죠.

얼마 전에 제가 영화를 한 편 봤는데요. 영화관을 대절해서 저 혼자 하고 제 아내하고 두 명만 봤습니다. 어떤 영화를 봤냐면 제 동창인 정진영 배우가 감독이 돼서 만든 영화 <사라진 시간>이라고 하는 영화를 봤습니다. 미스터리 영화 장르에 속할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 내용이 무엇이냐면, 밤만 되면, 다른 사람으로 변한 사람의 이야기, 사실 그런데 그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다 다른 사람으로 변해요. 그래서 그 어떤 선생이, 선생이 선생의 와이프가 있는데, 밤마다 이상한 사람으로 자꾸 변해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알게 된 동네 사람들이 철창에 가두어 둡니다. 어떤 무서운 사람으로 변할까 두려워서, 철창으로 가려놓고 나오지 못하게 만든, 그것을 조사하던 형사가 나중에는 변화가 돼가지고, 그 선생님으로 변화되는데, 아무튼 이렇게 왔다 갔다 하니까,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 영화인데, 나중에 그 형사가 조진웅 배우가 그 사람, 어떤 한 여인을 만나는 거예요. 만났는데, 그 여자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요. 저한테 단점이 하나 있어요. 저는 밤에 다른 사람으로 변해요. 그 이야기를 할 때, 그 형사였다가 선생으로 변해버린 그 주인공이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그거 나 알아요.” “그 아픔이 얼마나 큰지 나 알아요.” 그 이야기 앞에 그 앞에 있던 여인이 눈물을 흘립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철창에 가두고, 사람들은 내가 악마가 된다고 저리 가라고 하고, 나를 쫓아내는데, “내가 그 아픔을 안다”라고 하는 그 사람 앞에서 마음이 녹는 거죠.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아픔을 우리 주님께서 아십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예쁘게 입은 옷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사람들은 우리의 얼굴 생김새로 판단하고, 키로 판단하고, 우리가 가진 것으로 판단하고, 말투로 비웃고, 우리들이 사는 곳이 무엇이고, 차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우리들을 외면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보세요. 실패한 부모 같아서, 괴로워 눈물 흘리는 그것을 우리 주님께서 이해하셔요. 여러 가지 고통 때문에 힘들어하는 바로 그 모습을 우리 주님께서 이해하고, 외면하고 가두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할까? 저 사람은 왜 저런 모습을 보일까? 아무도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사정을 알고 계시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지신 그 놀라운 사랑의 은혜를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 계시록 강해: bit.ly/계시록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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