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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요한계시록 강해

마라나타 – 계시록 강해 12

천국은 너무 좋은 곳이다. 이 세상이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라면, 천국은 그러한 것들이 전혀 없는 너무나도 좋은 곳이다. 만일 천국이 정말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어서 빨리 천국에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 세상에서 아등바등하며 사느니 천국에 어서 빨리 가면 좋겠다는 생각은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한 번쯤 가지게 되는 생각이다. 특히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고 어서 속히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고대하곤 한다.

하지만 빨리 죽어서 천국에 가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은 건전한 신앙적 관점이 아니고, 성경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첫째, 이러한 사실은 엘리야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엘리야 선지자는 너무나도 지친 나머지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지금 당장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가 달라고 간구하였다. 그러한 울부짖음을 하나님께서는 수용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다시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셨다. 둘째, 예수님의 모습이 변모되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보였던 베드로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서 알 수 있다. 오히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가셨다. 셋째,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가 언제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그런 시기는 알려고 하지 말고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라고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행 1:7-8).

어차피 죽으면 이 세상에서 누리던 모든 것들을 다 놓고 가야 하는 것이고,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 이후의 영생이라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세상의 삶을 소홀히 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말이 오히려 더 성경적인 관점을 담고 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마라나타(주여, 오시옵소서)라고 외쳤다. 이 말은 어서 빨리 이 세상의 질서를 끝내버리고 어서 속히 천국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말은 주님께서 임재하셔서 친히 다스려 달라는 간구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세상을 포기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이 주님의 뜻대로 다스려지게 되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마치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것과 같다. 크리스천은 천국을 향해 도망가버리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세상에서의 사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각각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주어져 있을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제 거의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기지 않은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해달라는 간구이다. 악이 지배하는 세상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이는 세상이 되길 간구하는 기도의 제목이다.

하늘 – 계시록 강해 11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사도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당의 환상을 보았다. 이전에 있었던 하늘과 땅과 바다는 사라져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하늘과 땅이 사도 요한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새 예루살렘은 마치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 새 예루살렘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성의 빛이 보석과 같고 수정 같았다는 점이며, 그 예루살렘 안에는 성전이 없었다는 점이고, 해와 달이 비추는 것이 필요 없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환상은 우리 성도들이 마지막에 들어갈 저 천국의 모습을 그려준 것이다.

이러한 환상을 보면서 사도 요한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아주 큰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앞에는 악한 세력이 다스리고 있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박해를 당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의 상황과 비슷하다. 코로나로 인해 일상이 무너져버리고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모든 것이 무너져버릴 것 같은 불안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시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미리 보게 해주시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교회당을 건축하게 될 때, 성도들은 설계도를 보면서 가슴이 설렜다. 아직 눈앞에 완성된 교회당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설계도를 보면서 얼마 뒤에는 저런 모양의 예배당이 들어서게 되리라는 것을 생각했고, 그것을 꿈꾸면서 행복했었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께서는 지금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천국의 설계도, 천국의 청사진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저 천국을 소망하면서 지금 새로운 힘과 용기를 가질 것을 권면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었다. 그것은 아주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하면 언제나 성전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성전이 없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기 때문이다. 사실 이 땅에서의 성전은 아이러니한 것이었다. 성전의 목적은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그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다. 장사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은 영적인 착취를 하고 있었으며. 일반인들도 하나님을 만나려는 목적보다는 그저 면죄부만 얻고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방법으로만 성전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계셔서 거기서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신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는 회복된 에덴동산의 모습을 그려준다. 최초의 인류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았던 곳이 에덴동산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는 저주가 없고 생명수가 흐르는 곳으로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을 다시 품게 된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고통이 있고 실패가 있고 아픔이 있지만, 우리는 내팽개쳐버린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 – 계시록 강해 10

요한계시록 19장에는 허다한 무리가 찬양하는 장면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다고 노래하고, 이제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다가왔다는 것을 노래하였다. 혼인잔치는 천국을 묘사하는 가장 적합한 비유이다. 혼인잔치에서는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듯 천국도 더 이상의 슬픔과 고통이 없고 기쁨으로 가득찰 것이라는 의미에서 천국을 나타내는 비유로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들이 하나님의 신부라는 이미지로 묘사하는 것이다.

또한 19장에는 백마를 탄 자의 환상이 기록되어 있다. 백마 탄 자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며 공의로 심판하기도 하고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으로 만국을 치고 철장으로 다스리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적들을 물리치시고 승리하신다는 것을 상징한다. 지금 초대교회 성도들은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 있지만, 사실은 이렇게 살다가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승리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환상이었다. 당연히 이런 환상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아주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20장에서는 천년왕국에 대한 묘사가 있다. 천사가 사탄을 무저갱에 넣고 인봉하여 다시는 미혹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때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게 된다.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에는 아직 이러한 모습이 실현된 것 같지는 않기에, 사람들은 이 천년왕국이란 미래의 일이라고 간주하곤 한다. 그래서 7년 대환란이 지난 후에 천년왕국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이러한 관점을 가리켜 흔히 전천넌설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관점은 별로 건건한 관점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은 사탄을 제압한 사건으로 충분히 볼 수 있다. 이미 여러차례 성경에서는 주님의 도래와 더불어 사탄을 결박하였으며(마 12:28-29),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눅 10:17-18)고 묘사하고 있다. 또한 성도들은 이미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선포되고 있다(벧전 2:8). 그런 점에서 20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은 미래의 일이라기보다는 현재의 모습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스스로를 보면서 자존감이 낮아질 때로 낮아졌다. 그들은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어려운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성도들을 미혹하고 박해하는 세력의 위협은 너무나도 커서 곧 죽을 것만 같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사탄의 위협을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은 이미 사탄을 굴복시켰고 결코 그 미혹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성도들은 왕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걸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라이언킹이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자신이 밀림의 왕 사자인데도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자조와 체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심바에게 자신 속에 아빠 사자가 살아 있으며 밀림의 왕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과 같다.

우리 성도들은 주변에서 돌아가는 상황에 겁먹을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겠지만 담대해야 한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다(요 16:33).

심판 – 계시록 강해 9

두 짐승의 환상은 미래에 펼쳐질 일을 에언한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현재 사도 요한과 초대 교회 성도들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다.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위험한 것이고, 신앙을 버저리고 악에게 복종해야만 겨우 먹고 살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그 당시의 상황을 그려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환상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그 가공할 짐승을 보면서 두려워 떨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 반대다. 이러한 가공할 위험도 영워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끝장날 때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성도들은 그러한 위험 속에서도 보호되고 있으며 심지어 믿음을 지키다가 죽는다고 해도 그 죽음은 복된 죽음이라는 것을 말해주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5-18장은 두 짐승의 환상 뒤에 심판의 환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은 예언적인 내용이다. 아직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마음대로 활보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7천사가 7개의 금대접에 재앙을 담아서 하나씩 부을 때마다 아주 무시무시한 재앙이 이 세상 가운데 일어나는 모습을 사도 요한은 보았다. 그 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천사들이 대접을 쏟을 때 독한 종기가 생겨나고 바다 생물이 죽고 물이 피로 변하고 불로 사람들을 태우고 온 세상이 어두워지고 유프라테스 강이 말라버리고 섬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하늘에서 한 달란트나 되는 무거운 우박들이 쏟아지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이러한 재앙이 쏟아지는 것은 언제일까?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나, 혹은 중동 전쟁이나, 핵폭탄 투하 같은 것들이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주장하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주님께서 도둑같이 올 것이라고 하신 것처럼(16:15),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닥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여기에 묘사된 그대로 재앙이 쏟아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이 묘사를 통해서 엄청난 재난이 닥칠 것을 그려주는 것이지, 이 방식 그대로의 재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짐승을 탄 음녀의 환상을 보았다. 음녀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이 영적인 간음이라고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음녀는 나중에 바로 그 짐승이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불로 살라버리게 된다(17:16). 음녀는 하나님을 버리고 짐승과 합한 자인데, 왜 짐승이 음녀를 이렇게 취급하는가? 그게 이 세상 우상의 본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이 세상을 선택하는 이유는 우리들에게 유익을 줄 것이라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상은 항상 우리를 배반한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망하게 한다.

요한계시록 18장은 맷돌을 바다에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나타내는 것인데, 사실 바벨론은 역사상 벌써 사라진 국가이다. 그런데 이 바벨론이란 표현으로 지금 이 세상을 장악하고 신앙을 위협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들의 세력이 아무리 위협적이라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것이다. 그게 심판의 환상이 보여주는 약속이다.

어쩌면 우리는 초대 교회 성도들이 살던 시기와 비슷한 시기를 살고 있다. 지금은 악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리고 그 악에 순종하며 살아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은 위협을 느끼며 살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있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