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카테고리:] 신앙강좌(성경론)

꿈과 신앙생활(신 13:1-3) – sola scriptura 09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들 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 한들,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엉뚱한 방향으로 열심을 낸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던 그 옛날 바리새인들처럼 결국 위선자라는 소리만 듣게 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점에서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천사를 사용하시기도 하고, 우림과 둠밈을 사용하시기도 하고, 에봇이나 제비뽑기를 사용하기도 하셨다. 꿈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셨다. 문제는 과연 오늘날에도 이런 방법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법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겠다고 하시면, 못 하실 리 없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까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꾼 그 꿈이 과연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꿈인지 소위 개꿈인지 확인할 객관적이고 확실한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실례로 예전에 다미 선교회에서는 이런 저런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었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이 주장한 예수님의 재림은 빗나가고 말았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66권의 성경 외에 다른 것을 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계 22:18-19). 이미 성경이 완성된 시대에는 성경 말씀에 의존하여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지, 꿈이나 어떤 초자연적인 것에 의존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한 때 꿈이나 제비뽑기를 사용하셨는데, 그렇기 때문에 꿈이나 제비뽑기라는 방법이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사용한 사람을 숭배하거나, 하나님께서 사용한 물건을 신성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한 때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었던 언약궤였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그것을 전쟁터로 가지고 간다고 해서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꿈이나 제비뽑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제비를 뽑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이 무조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한 때 하나님께서 제비뽑기라는 방법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로 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던 것뿐이지, 언제든지 제비뽑기만 하면 범인을 찾을 수 있거나 우리에게 적절한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수단을 절대화하는 어리석음에 빠지면 안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6조에서는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명백히 제시되어 있거나 건전하고 필연적인 논리에 의해서 성경에 의해 추론될 수 있다고 정리하는데, 우리는 성경에 따라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전통과 신앙생활(마 15:1-9) – sola scriptura 08

전통은 우리들에게 유익하다. 인간의 장점은 한번 습득한 경험과 지식을 후손들에게 전수할 수 있어서, 그 다음 세대가 처음부터 다시 경험을 해야 하고 연구를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선조들의 지식과 경험에 근거해서 더 발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인류는 대단한 문화를 형성해온 것이다. 신앙적인 면에서도 전통은 아주 유익하다. 지금까지 수천 년에 걸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왔고 고민해왔고 대화와 연구를 통해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발견해왔다. 따라서 우리들은 마치 아무 것도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처음부터 연구해서 성경의 뜻을 발견해나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발견한 진리 위에 기초한 전통을 통해서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다(고전 11:1). 이러한 표현은 참으로 놀랍다. 완벽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모범으로 제시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이 표현은 자신이 완벽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신앙의 길을 먼저 간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걸어갔던 경험을 제시하면서 따라 해보라는 것이다. 마치 여러 가지로 부족한 엄마이지만 자녀들에게 이렇게 해봐 저렇게 해봐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만일 누군가 그 동안 쌓여져 내려온 전통을 무시하고 새롭게 성경에 근거해서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참으로 가상한 일이 되겠지만,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신앙생활에 있어서 전통은 유익한 점이 많다. 새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완벽하게 성경을 꿰뚫고 있는 신학박사에게서 배워야만 신앙생활을 잘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몇 달 전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으로부터도 많은 유익을 받을 수도 있다.

우리가 개혁주의적 신앙의 전통 또는 칼빈주의적 신앙의 전통 가운데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와 대요리 문답과 소요리 문답이라는 선조들의 유산을 받고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이 세상에 잘못된 가르침이 난무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성경을 가장 잘 정리한 것으로 평가되는 전통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통은 우리가 100% 완벽하게 신뢰할만한 것이 되지 않는다. 때로는 전통이 성경적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 처음 전통이 만들어질 때에는 성경적인 것이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알맹이는 빠지고 껍데기만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그랬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책망하셨다(마 15:3).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이어받은 신앙적인 전통이 정말로 성경 위에 근거한 것인지 늘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에 근거한 전통이라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전통은 우리에게 해로운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가?(행 17:11-12) – sola scriptura 07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한 편으로 그렇다. 우리는 성경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전달하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또 한 편으로 설교는 엄격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는 아니다. 성경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설교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실제로 거짓 선생들이 잘못된 사상을 전한 바 있으며, 오늘날에도 수많은 이단들이 잘못된 이단 사설들을 강단에서 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설교가 권위를 가지는 것은 오직 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철저하게 근거할 때이다. 

따라서 우리는 설교를 들을 때 과연 이 설교가 성경적인 근거 위에 바로 서 있는지 분별해야 한다(요일 4:1). 설교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인 잘못된 태도가 있는데, 첫째는 설교를 무조건 거부하고 듣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이고, 두번째는 설교를 덮어놓고 맹종하는 태도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도 마음을 닫아버려서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분별하지 않고 무턱대고 맹종하다가 소경이 이끄는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다. 

설교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비교적 그 실수가 미약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상고하면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아주 심각한 것이라고 한다면, 설교자에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설교자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잘못 오해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이후부터는 설교자가 보다 명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돕게 될 것이다. 또는 자신이 설교를 잘못 오해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은 성경이 최고의 기준이며, 모든 것들은 (설교를 포함에서) 그 성경의 권위 밑에서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에 드러난 하나님의 지문(시 19:1-4) – sola scriptura 06

하나님께서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우리들에게 말씀하실 뿐인가?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직접 나타나서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천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도 하셨다. 뿐만 아니라 구약시대에는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 그리고 에봇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기드온의 요청에 따라 양털에 이슬이 내리는가 여부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셨다. 더 나아가 이 세상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이라면, 그리고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함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고 하다면, 자연현상이나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건들에는 하나님의 뜻이 반영되어 있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지만, 자연현상이나 우리가 만나는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고도 객관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자연현상이나 우리가 만나는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하나님의 뜻은 오직 주관적일 뿐이다. 

사람들이 자연현상이나 여러 가지 경험을 신앙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우선 이러한 시도는 영적으로 유익할 수 있다. 요나가 풍랑을 만났을 때 이 풍랑이 자신의 죄 때문임을 깨닫고 그래서 회개했던 것처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반대로 이러한 일들을 경험하면서도 마음을 완악하게 하면서 계속해서 악의 길로 걸어간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재앙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현상이나 우리가 만나는 여러 가지 경험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재료로 사용할 때이다. 종종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면서 우리는 이러한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은 죄 때문이 회개해야 한다고 권면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욥의 친구들이었다. 이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책망하셨다(욥 42:7-9). 우리는 선생노릇을 하지 말아야 한다(약 3:1).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함께 울어주는 것이 바른 성경적인 태도일 것이다(롬 12:15). 

결론적으로 자연현상이나 우리가 만나는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는 것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해석이 잘못될 가능성이 많음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분명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에 의지하여 신앙생활을 해야 하며, 주관적인 해석에 의존하는 것을 지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