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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가?(행 17:11-12) – sola scriptura 07

아주 도발적인 그런 질문을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가라고 하는 주제의 제목입니다. 이런 질문을 한 이런 질문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생각해 보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배웠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최고의 기준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성경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 66권의 성경만이 우리들의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최고의 권위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함께 배운 적이 있는데요. 이렇게 오직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유일한 권위가 된다고 하는 그 말을 라틴어로 어떻게 표현을 하죠? sola scriptura.

어떻게 그렇게 잘하십니까? 아, 화면에 나왔습니다. 솔라 스크립트라. “오직 성경만으로”라고 하는 이 표어가 있는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의 신앙생활에 기준이 되는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그 근거가 무엇인가 할 때, 기준이 무엇인가 했을 때, “성경만이 우리들에게 가장 최고의 기준이 된다”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함께 배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성경 말씀보다 더 높은 권위를 인정하는 그 어떤 다른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잘못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과 동등한 종류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기준이 되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설교는 무엇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매 주일마다, 그리고 예배 때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설교를 듣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설교는 무엇인가? 설교는 성경 말씀을 우리들에게 풀어서 설명해 주는 말씀으로써, 성경 말씀 그 자체는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는 아니고, 우리는 설교를 들을 때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도 있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설교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구분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 시간에 기도를 하면서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들려줘서 내가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순종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 기도를 드리면서, 우리는 설교를 듣게 됩니다. 하지만 엄격하게 말하자고 한다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는 아니고,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해 주고 풀이해 주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맞습니다.

우리는 설교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표현을 많이 합니다. 설교자를 소개할 때 아무 아무개 목사님이 나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겠습니다.”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될 때, 우리는 아멘으로 그 설교를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엄격하게 구분한다고 하면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성경 말씀을 풀이해서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설교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말씀을 풀이해 준 제2차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설교라고 하는 것은 100% 순수하고 오류가 전혀 없고 그래서 우리가 무조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도 괜찮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가 아니라, 안타깝게도 설교를 하는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전달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전달할 가능성들이 존재하게 되는데요. 어떤 가능성들이 존재합니까? 첫 번째는 설교자가 악해서 설교자가 악의적으로 설교를 잘못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잘못 전달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악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서 가르치는 경우가 아니라 할지라도, 악의적인 마음은 없었다 할지라도, 설교자가 부족해서 설교자가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지 못해서, 실수로, 혹은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강단에서 선포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말을 전달하기 게임을 하게 되면, 말 전달하는 것이 100% 완벽하게 아무런 오류가 없이 제대로 잘 전달되는 경우가 있습니까? 말 전달하기 게임을 하게 되면, 언제나 중간에 말이 바뀌게 되는 것 같아요. 속담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몸짓으로 표현하라고 해도, 잘못될 수가, 아니 말을 그대로 정해서 그 말을 그대로 전달하라고 했을 때에도, 이 사람을 거치고 또 또 한 사람을 거치고 또 한 사람을 거치면서, 말의 전달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정확하게 오류가 없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잘못 전달될 가능성이 항상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달하는 설교의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 주셨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풀어서 전달하는 그 과정 가운데서, 악의적이든 악의적이 아니든, 어떠한 방법으로든, 잘못된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실제적으로 그 예를 들면 바울 사도가 활동하던 시기에 거짓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초대교회를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다고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파한 것이 아니라, 거짓 복음을 전파했던 것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초대교회에서 복음을 증거 하면서, 그런 거짓 사도들이 잘못 가르친 잘못된 복음과 싸움이라고 굉장히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던 것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압니다.

뿐만 아니라 그 실례를 본다고 한다면, 이단들이 존재하는 것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압니다. 이단들도 교회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설교라고 하는 것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설교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강단에서 전하는 것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고, 그들은 강단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수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그런 이단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다고 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이단들 가운데는 처음부터 잘못된 곳에서 잘못 배워서 이단이 된 사람들도 있지만, 그중에 어떤 사람들은 정통 교단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정통 교단에 있었던 목사들 중에서도, 나중에 잘못되어서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잘못된 말씀을 전하는 그런 잘못된 이단 설교자들이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단들이 아니라 할지라도, 정통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목사님들이라 할지라도, 똑같은 본문에 대해서 똑같이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각 목사님들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복음을 전합니다. 감리교 목사님이 전하는 것과 장르고 목사님이 전하는 것이 다르고, 순복음 목사님이 전하는 것과 침례교 목사님이 전하는 것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고, 심지어 가장 최악의 경우는 악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강단 위에서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속이는, 그런 잘못된 목회자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만일 이 자리에서 전하는 그 모든 말이 말을 들을 때 설교를 들을 때, 이 아래에 있는 설교를 듣고 있는 그 모든 회중들이 그 말은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아멘으로 무조건 받아들이고 맹목적으로 추종하기 시작한다고 하면, 얼마나 사람들을 속이기 쉽겠습니까? 제가 나쁜 맘먹고, 먹으면 만일 여러분들이 무조건 제 말을 듣는다고 하면, 그다음부터는 제가 나쁜 마음을 가지고 악의적인 말을 해도, 그 말을 무조건 듣는다고 한다면, 그러면 아주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라고 하는 것은 100% 완벽하게 정황 무고한 하나님의 말씀과는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는데,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기준은 오로지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만이 최고의 기준이고, 이 하나님의 말씀과 똑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다른 어떤 것이 그것이 설교라 할지라도 똑같은 권위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설교가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은, 설교를 우리가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권위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그 설교를 누가 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과연 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에 바로 근거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앞에서 예배 시간에 정통 교회에서 전해지는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권위 있는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성경 말씀에 정확하게 근거하고 있고, 성경 말씀을 바로 가르치고 있을 때에만, 그 설교가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설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똑같은 사람이 이야기를 했다 할지라도, 하나는 정말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말이지만, 또 하나는 우리가 인정해서는 안 되는 말이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16장의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말을 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예수님께서 질문하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내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하신 것은 혈육이 아니오. 하나님께서 내게 알게 하신 것”이라고 하면서 그 베드로를 칭찬하며, 정말 베드로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말을 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예수님께서,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가르치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서 “예수님,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십자가를 말리기 시작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베드로 조금 전에 칭찬했던 바로 그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니라.” 하면서 베드로를 책망하신 그 메시지를 우리가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말하면, 그러면 그 권위가 있는 말씀이 아닌 겁니다. 베드로가 말했기 때문에, 그 말이 옳은 말이 아니라, 베드로가 말했던 그 말이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느냐? 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느냐에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도 생기는 겁니다. 천주교회가 아쉬운 것이 있다고 한다면, 천주교회는 형식적, 형식적인 그런 것을 보고, 그 형식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베드로를 제1대 교황으로 생각하고, 그리고 베드로를 이어서 2대 3대 베드로의 자리를 앉은 그 사람은 우리들의 교황이 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 교황이 말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무조건 따라야 된다고 하는 그런 형식적인 관점을 천주교에서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것처럼, 똑같은 베드로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그 뜻을 거역하는 사탄의 말을 할 수도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한다고 하면, 형식적인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이 설교 강단에서 전해지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는가 여부가 훨씬 더 중요한 그 근거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 강단 위에서 전해지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 설교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설교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고, 그런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영적인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만일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바로 전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설교를 들을 때에, 그 설교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때로는 그 설교가 내가 원하는 것과는 맞지 아니하고, 내 본성을 거스르기 때문에 듣기에 불편하다 할지라도, 예를 들자면 회개하라고 하는 메시지는 우리가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런 메시지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만일 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정확하게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면, 내 마음이 불편하다 할지라도, 그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영적인 유익을 누릴 수 있고 영적인 진보를 이룰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문제는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설교를 해도 사람들이 그 설교를 외면해버리고, 그 설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멸망의 길을 계속 걸어가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촉구하며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애써 우리의 마음을 닫아버리고, 그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건데, 거기에 우리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살펴본 것처럼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이 이 베드로의 설교를 흘려보내고, 이에 대해서 반발하면서 베드로를 감옥 속에 가두었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게 될 때, 성경 말씀에 근거한 바른 설교가 전해지게 될 때, 그것을 외면하거나 듣지 않거나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아주 불행한 일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하지 아니하고,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지 않고 거짓된 가르침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게 된다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데요. 그렇다고 한다면, 무조건 설교이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강단 위에서 전해졌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이면 안 되는 거예요.

요한일서 4장 1절 말씀에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수많은 거짓 선지자가 있다는 거예요. 거짓 선지자가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지 아니하고, 잘못된 복음을 전할 때, 그냥 믿어서는 안 되고, 무비판적으로, 아무런 분별없이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이냐면, 과연 전해지는 이 메시지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인지,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은 것인지, 분별하여 받아들이라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설교를 들을 때 과연 이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의 말씀을 보면, 베뢰아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사도행전 17장 11절 12절 말씀을 보니까,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함으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반응은 아주 놀랍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무조건 예수님을 거부했고, 데살로니카 사람들은 바울 사도를 핍박하면서 거부했는데,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 과연 이 바울 사도가 하는 말이 성경 말씀에 근거한 것인지, 한번 따져보자.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것인지, 내가 따져보자 하고, 그 말을 듣고, 과연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맞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 베드로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설교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인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잘못이 무엇이냐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생각하고, 무조건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정말 아쉬운 태도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설교를 통해서,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인데, 그리고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영적인 유익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무조건 안 들어버리는 거예요. 저걸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에게 들려주시는 거기 때문에, 마치 왕의 명령을 들은 가지고 온 사람이 어명을 받으라고 외치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마치 왕의 명령을 듣는 것처럼, 진지하게 왕의 명령을 들어야만, 어명을 받는 자세가 될 것인데, 설교를 들을 때 저것은 한 사람의 이야기요. 저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오 저것은 나에게 별로 중요한 말씀이 아니라고 외면해 버리면서 설교를 듣지 않고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무조건 거부하는 태도가 우리들에게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극단적인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신앙 때문에 그렇게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고요. 또 어떤 사람은 설교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설교를 듣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설교자가 마음에 잘 든다면, 설교자를 좋아한다고 하면, 설교가 귀에 쏙쏙 잘 들어오겠지만, 설교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리 열변을 토해도 그 설교가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옳지 않은 설교자가 이 앞에 서 있다고 할지라도, 때로는 위선적인 설교자가 이 강단 위에 서 있다 할지라도, 내가 보기에는 정말 한참 부족하고 정말 인격이 떨어지는 부족한 목회자가 이 앞에서 설교를 전한다고 할지라도, 이 앞에서 설교하는 자가 목사 안수를 받지 아니한 훈련을 받고 있는 신학생이요, 전도사가 이 앞에서 설교를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보고서 설교를 판단할 것이 아니라, 과연 이 설교 말씀을 통해서 들려지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는지 성경을 묵상하면서, 상고하는 것이 옳습니다.

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이 마음에 안 들어도, 그 선생님의 과목을 열심히 공부해야 좋은 점수받을 수 있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너무 싸납고, 선생님의 그 행동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 저 선생님 정말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해서, 그 선생님이 가르치는 과목은 무조건 거부해버리면, 그것은 학생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처럼, 강단 위에서 전해지는 메시지를 들을 때에 그 앞에 서있는 사람이 마음에 들던지 들지 않든지, 담임 목사가 전하든 부목사가 전하든, 전도사가 전하든 사람을 보고서 듣는 것이 아니라, 과연 그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지, 바라봐야 되는 거예요. 바라보고 만일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 믿고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면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말씀하실 때,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엄청난 비판을 하셨습니다. 성경 속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얼마나 악한 말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나쁜 말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화 있을진저 “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비판하고, 바리새인들은 정말 참된 신앙인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비난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것은 절대로 듣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절 말씀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바리새인들의 행위가 위선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는 그들의 행위를 본받아서는 안 되겠지만, 그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다고 한다면, 바리새인이 전해도 그 말을 들어야 돼요. 강단 위에서 전하는 설교자가 마음에 안 들어도, 그 전도하는 그 설교하는 사람이, 전도사가 설교를 해도, 그것이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그 말씀 가운데 나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지 듣고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려고 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에게 어마어마한 영적인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정반대로 설교에 대한 잘못된 두 번째 극단적인 잘못이 있는데, 그것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강단에서 전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무엇이든지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그런 태도 역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강단 위에서 잘못되고 비성경적인 메시지가 전파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겠고,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성경을 오해해서 잘못 전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못된 가르침을 하고 있는데도 무조건 받아들여서 그 말대로 따라가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다가 결국 모두가 다 구덩이에 빠지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로 그러한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원래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했을 때 갈라디아 교인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거짓 선생님들이 나타났습니다. 거짓 선생들이 나타나서 잘못된 가르침을 가르쳤을 때, 갈라디아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그 거짓된 말씀을 거부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에 따라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을 향해서 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까? 갈라디아서 1장 6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 사도의 표현은 아주 놀랍습니다. 우리가 전하면 다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이면, 무조건 다 받아들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내가 전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잘못된 복음을 가르친다면, 저주를 받을 것이오. 천사가 내려와서 전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엉뚱한 말씀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설교라고 하는 형식과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이 강단 위에서 예배 시간에 설교하면, 그러면 그런 형식이 충족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무슨 내용인가가 중요한 것이죠. 설교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인가? 오직 우리의 신앙생활에 유일한 신앙의 근거가 되는 솔라 스크립트라(sola scriptura) 성경 말씀에 근거한 좋은 설교를 들을 때, 그 설교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순종할 때, 우리에게 영적인 유익이 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들에게 실제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듣는 설교 가운데, 만일 비성경적인 내용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강단 위에서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이 강단 위에서 설교하는 설교자들의 설교 가운데 강사로 초대받은 목사님들, 혹은 장로님들의 메시지 가운데, 비성경적인 내용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 먼저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설교는 100% 완벽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런 점에 있어서 약간의 오류와 비성경적인 내용이 포함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완벽한, 무고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된 내용들이 포함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설교를 들을 때 베뢰아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경을 상고하면서 성경적인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고, 만일 오류와 잘못된 것과 비성경적인 내용을 설교 가운데서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리고 만일 그러한 오류와 잘못과 비성경적인 내용이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라, 약간의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지를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은혜를 받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논어의 수리 편에 보면 공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삼인행 필유아사언 택기선자이종지 기불선자이개지(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세 사람이 길을 가게 되면, 그 가운데 한 사람은 분명히 나의 선생님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착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는 따를 것이오. 만일 착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것은 고칠 것이니라“라고 공자가 이야기했다고 하는데, 어쩌면 우리들에게 유익한 그런 자세를 가르쳐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잘못된 것을 듣게 된다고 하면, ”아, 저렇게 잘못 전할 수 있겠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통해서 나라고 한다면 어떻게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지를 살펴봄으로써, 오히려 우리는 좋지 않은 설교를 통해서도 우리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 전해지는 그 상황 속에서도 그것이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바르게 고침으로 말미암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영적인 유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아주 심각한 비성경적이고 아주 잘못된 것을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달려 나와서 모가지를 잡고 끌어내릴까요? 성경의 가르침은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5절 말씀에,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과만 상대하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고요. 빌립보서 2장 1절서부터 4절 말씀에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행동의 원칙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용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의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누군가 죄를 짓든, 아니면 잘못을 행하든, 아니면 잘못된 메시지를 전하든지 간에 이 문제를 해결하는 성경적인 방법은 겸손하게 사랑을 가지고 해야 되는 것인데, 당사자에게 직접 찾아와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한 당사자에게 찾아가서 대화를 시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비성경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비성경적인 방법은 다른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면서 동조를 구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잘못 저런 잘못 이런 잘못된 것들을 소문을 내면서, 동조를 구하면서 여러 가지 여론을 만들어내 가는 것은 이 세상 악한 사람들의 방법일 것입니다. 잠언서 20장 19절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만일 설교 가운데서 비성경적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면, 찾아와서 어떠한 내용이 잘못된 것인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설교자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청중들에게 잘못된 내용으로 전달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앞으로는 좀 더 설교를 분명하게 오해하지 못하도록, 좀 더 분명하고 선명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설교자를 도와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겁니다. 따라서 그런 유익을 얻게 된다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다른 성도들도 좀 더 분명하고 선명한 설교를 듣게 되어서, 다른 성도들도 많은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실 성경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되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동시에 나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세 분이라 말씀하시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주관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없어지는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져서, 누구에게나 속박되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고, 여러 가지 모순되어 보이는 내용들을 많이 하고 있고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을 강조하다 보면 성경을 오해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겁니다. 따라서 만일 비성경적인 내용이 있어서 설교자에게 이런 문제 때문에 잘못 이해를 한 것 같아서, 와서 도와주게 된다고 하면 앞으로 설교자는 혹시 자신이 또 다음 설교를 할 때 다른 잘못 들릴 수 있는 가능성들을 줄여나가면서 설교함으로써, 좀 더 설교자를 좀 더 아름답고 멋있는 설교자로 만들어주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설교자에게 찾아와서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설교자가 잘못 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잘못 오해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기도 할 겁니다. 사실은 우리가 마음이 불편하게 되는 경우는 상대방이 말을 잘못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오해해서 잘못 이해하고 그래서 마음이 불편해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설교자에게 와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설교자가 그런 의도로 설교한 것이 아닌데, 듣는 내가 나의 특별한 상황과 처지 가운데서 그 설교를 듣다 보면 잘못 오해할 수도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래서 내가 좀 더 설교를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는 그런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화를 통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을 끼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 말을 하고 약간 걱정이 돼요. 우리 성도님들이 다 쫓아올까 봐. 하지만 우리는 대화를 통해서, 만일 오해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아니 혹시 마음에 불편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얘기를 통해서 대화를 통해서, 설교자를 교정하거나 아니면 내가 교정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인데, 만일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들의 방법을 쫓아서 소문만 내게 된다면, 그리고 그 소문을 간접적으로 듣게 된다고 하면 정말 의기소침해지고 교회에 좋은 유익을 끼치기보다는, 악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경향들이 많습니다.

만일 이런 방법을 통해서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 장로교 시스템 속에서는 노회에 이야기해서 제대로 성경적인 가르침을 가르치지 않는 그 문제들에 대해서 해결할 수가 있겠고, 만일 노회를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하면, 다른 어떤 선택을 해야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결론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했을 때, 그것은 누가 이야기해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았을 때에는, 그 누가 이야기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상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제대로 전파되는지 파악해야 될 것이고, 그걸 통해서 우리의 영적인 유익을 길러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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