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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창세기 강해

롯을 구한 아브라함 (창 14:1-16)

2021년 3월 14일 주일2부예배 설교

아무리 연약한 초식동물이라 할지라도 맹수의 공격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서로 모여 있는 것이다. 사자와 같은 맹수도 얼룩말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한다. 그들이 원을 그리고 방어를 할 때에는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한다. 다만 그 무리 가운데서 떨어져나온 짐승은 쉽게 맹수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되어 있다. 영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마치 아무 힘이 없는 양과 같다(마 10:16). 이리와 같은 맹수의 공격에 취약하다. 그리고 사탄 마귀는 마치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벧전 5:8). 우리가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신앙생활을 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종종 성도들 중에는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다가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할 때, 우리는 믿음을 저버리지는 않지만, 교회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혼자 성경보고 기도하면서 신앙생활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아주 위험하다. 우리의 믿음을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롯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과 고모라 지역으로 가서 살았다. 그때 마침 그돌라오멜을 비롯한 4개 부족 연합군이 공격해왔다. 그때 롯은 끌려가게 되었다. 만일 그 옆에 아브라함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브라함이 도와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롯은 아브라함을 떠났고, 그 결과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우리가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는 영적인 공격에서 함께 방어하기 위해서이다. 혼자 있으면 무너지기 쉽기 때문이다. 다윗은 모든 사람이 전쟁터에 나가고 혼자 있을 때, 범죄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와는 혼자 있을 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게 된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함께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함께 예배해야 하고, 서로가 권면하면서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야 사탄의 영적인 공격을 이겨낼 수 있다.

아브라함은 롯이 사로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머뭇거리지 않았다. 318명의 용사들을 이끌고 가서 롯을 구해냈다. 사실, 이 순간에 아브라함은 다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었다. 롯이 자신에게 잘못했던 일들을 기억하면서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또는 상대방의 세력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고 돕는 것을 주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가서 도와주었다. 왜 그랬을까? 아브라함이 롯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롯이 전에 잘못을 했다 할지라도 아브라함은 롯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를 구원하였다.

우리에게도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계시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떠난 롯과 같이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았다.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어주셨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롯이 떠난 후에 (창 13:14-18)

2021년 3월 7일 주일2부예배 설교

눈 뜬 장님이란 말이 있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종종 안경을 착용하고 있으면서도 안경을 찾기도 하고, 핸드폰을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핸드폰을 찾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영적인 면에서도 그럴 때가 종종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널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잘 깨닫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경우를 가리킬 것이다.

롯과 헤어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다. 타향살이를 하면서 그래도 의지가 되었던 유일한 친척이었는데, 데리고 있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 헤어져야만 하는 아픔을 겪었던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었다. 롯을 떠났고, 자신이 선택해야만 했던 땅은 황량한 벌판이었다. 어쩌면 한숨이 나올 수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단순히 눈으로 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땅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라는 말씀이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다녀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안 된다. 걸어다녀 보아야 한다. 걸어다니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기억해야한다. 시편 34:8에서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생생하게 느껴보라는 뜻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떠나간 롯을 생각하고 나는 외롭구나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돌아다녀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이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였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답답할 때가 많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실망하고 주저 앉아 있을 게 아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 지금 당장은 황량해 보이는 벌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될 것을 기대하며 바라보아야 한다. 그 옛날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 땅에 도착해서, 소망을 품고 미래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부모라면 아기의 현재의 모습만 보고 실망하지 않는다. 그 아이가 자라서 앞으로 어떤 인물이 될지를 기대하게 되어 있다. 교사라면 그 학생의 현재의 모습만 바라보는 게 아니다. 그 학생이 자라서 위대한 인물로 성장할 것을 바라보며 가르쳐야 한다. 우리의 삶이 당장 힘들고 어렵더라도 고통스러워만 할 게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도, 우리의 현재 모습만 바라보지 않으셨다. 우리의 모습은 연약한 것 밖에 없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영화로운 잔치로 불러주셨다.

저주 속에 감추어진 축복(창 3:15)

성경은 하나님의 연애편지이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깊이 묵상해보면 한 구절 한 구절이 하나님의 사랑 고백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송이꿀 보다도 더 달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행위도 사랑의 행위이다. 하나님의 행위는 그 어떤 것도 사랑의 동기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 점에서, 선악과를 주신 것도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신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그 선악과를 먹고 타락했고 그로 인하여 비참한 결과를 얻게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질문을 던진다. 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만들지 않았더라면, 타락할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러한 질문은 아주 잘못된 질문이다. 운전하다가 교통신호를 어겨 크게 사고가 났다면, 자동차 회사를 향해서 왜 이런 자동차를 만들었느냐고 항의할 수 없는 것처럼, 선악과를 잘못 사용하여 타락한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것은 우리가 거절할 자유가 있을 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참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말을 전혀 거역할 수 없고 100% 순종하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로봇을 보면서 사랑에 빠질 사람이 있겠는가? 참사랑은 거절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불순종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때,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사랑이 참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제하여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게 만드시려면 만드실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마치 아무 처녀든지 지목하여 수종을 들라고 명령할 수 있는 왕이 궁중의 한 시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달라고 애걸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강제적으로 부수고 들어오시지 않고 문을 두드리면서 우리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셨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 대신 선악과를 선택했다. 거절할 수 있는 자유가 없는 물질에 불과한 선악과를 하나님 대신 선택한 것이다. 그것이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졌고, 선악과는 약속한 행복을 줄 수 없었다. 그게 우상을 선택한 비참한 결과일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범죄한 인간을 향해서 심판을 선포하셨다. 남자에게는 땀을 흘려 노동하는 저주를, 여자에게는 고통 가운데 잉태하는 저주를, 뱀에게는 땅에서 기어 다니는 저주를 선포하셨다. 하지만 그 저주는 저주만이 아니었다. 마치 자녀가 잘못했을 때 “집을 나가”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냐”라고 외치지만, 부모에게서 자녀에 대한 사랑이 끊어질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 저주 속에 축복을 숨겨놓으셨다. 즉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뱀의 후손의 머리를 부술 것이라는 예언이 들어 있었다. 이것을 원시복음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하던 바로 그 순간부터 구원을 위한 계획을 세우셨던 것이다.

성탄절을 그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에 따라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탄절을 앞에 둔 이 시기에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해야 하고,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놀라운 기쁨의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율법은 아무나 전할 수 없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않으면 전하는 힘이 없다. 하지만 복음의 기쁜 소식은 누구나 전할 수 있다. 나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오신 주님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구원의 주로 오셨다는 기쁨의 좋은 소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