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우리는 한나가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받은 이야기까지 살펴보았습니다. 한나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엎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이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나의 가정 가운데 아기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한나가 기도하고 서원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구했고,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이제 아기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무엇을 할 차례가 되었을까요? 서원을 갚을 차례가 됐습니다. 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대답을 해 주지 않으시는지 갑자기 당황스럽습니다. 기도하고 서원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그 한나에게 아기를 주셨다고 한다면 이제는 한나가 자신이 했던 그 서원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서원을 갚는 일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를 할 때 다급한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발 이걸 좀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서 서원하기도 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여러 가지 약속들을 하나님 앞에 하면서 기도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그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 기도하기 전에 가졌던 그 다급했던 마음,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어 달리던 그때의 그 심정들을 다 잊어버리고, 이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내가 아무런 다급함도 없었고 간절함도 없었던 것처럼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사람의 마음이 바뀌어 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화장실 가기 전과 후가 다르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말이 어쩌면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서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야곱의 경우를 살펴보면, 야곱은 밧단 아람으로 가는 길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앞에 서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저로 하여금 무사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신다고 한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그리고 내가 주님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서원하면서 은혜의 충만한 저녁을 보내며 하나님 앞에 기도로 매어 달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정말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무사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밧단 아람에 가서 라반의 집에서 일을 하면서 수많은 재물을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내와 자녀들까지도 얻게 되고, 정말 갈 때는 빈손으로 갔지만 돌아올 때는 어마어마한 물건들과 가족들과 가축들을 데리고 그렇게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 야곱이 전에 베델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그 기도의 제목들, 서원했던 것들을 다 갚았는가 하면, 잘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자세하게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과연 그가 십일조를 제대로 했는지 안 했는지 판단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우리가 알 수 있는데, “내가 이 베델에서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할 것”이라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지만, 이 야곱이 베델에 가서 산 것이 아니라 어디에 가서 살았습니까? 세겜에 가서 살았어요.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다른 우상들도 그 집 안에 있는 상태를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마찬가지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기도할 때는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정말 다급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 울며불며 기도하는데, 그 긴급한 문제가 다 지나가고 나면 언제 그런 기도를 했느냐는 듯 모든 것들을 다 잊어버리고 옛 생활로 다시 돌아가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한나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서원했던 그 서원을 잊지 않고 정확하게 하나님 앞에 그 서원한 것을 그대로 시행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을 낳고 난 다음에 첫 번째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러 가게 될 때 한나는 같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서원제라고 하는 것은 서원했던 것을 갚게 되는 제사인데, 그때 한나가 올라가지 아니한 이유는 서원을 갚지 않기 위해서 올라가지 않은 것도 아니고, 서원을 갚는 것을 늦추기 위해서 올라가지 않은 것도 아니라, 아직 사무엘이 갓난아기였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이 아이가 젖을 뗄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 아이가 젖을 떼게 되면, 그러면 이 아이를 여호와께 바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한나가 첫 번째 매년제와 서원제 때는 올라가지 아니했지만, 결국에는 이 한나가 이 사무엘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내용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젖을 떼는 것은 보통 언제 젖을 뗍니까? 예, 한번 말해 보세요. 돌 지나고 뗍니까? 예, 저도 하도 오래돼 가지고 다 잊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젖을 좀 일찍 떼지만, 예수님 당시의 상황을 보여 주는 여러 문헌들 가운데 ‘마카비 이서’ 7장 27절 말씀에 보면 3년간 젖을 먹였다고 하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날과는 달리 수유하는 것 외에는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은 상황 가운데서 엄마의 젖을 오늘날보다는 좀 오랫동안 먹였던 것이 그 당시의 상황이었지 않겠나 싶은데, 사무엘의 시대는 예수님의 시대보다 훨씬 더 오래전 이야기이겠지만 아마 그 당시의 상황도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 아이의 젖을 떼고 난 다음에—그러니까 아마도 3살 정도 되었을 때—이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에게 데리고 가서 그 엘리 제사장에게 드리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상 1장 22절 말씀 가운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이르되, 아이를 젖때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 한나는 지금 아직 올라가지는 않지만 올라가겠다고 하는 계획을 가지고 그 서원을 잊지 아니하면서 결국 이 서원을 갚겠다고 하는 이야기를 엘가나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한나는 자신이 했던 그 서원을 잊지 않았는데, 만일 한나가 기도할 때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으로 기도했다고 한다면 아마도 금방 자신이 했던 서원을 잊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흥정의 목적은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내는 데 주안점이 있기 때문에, 받아내고 난 다음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게 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하는 말을 했다가, 흥정을 했다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어 버리게 되는데, 한나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흥정하는 마음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 감사의 마음으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내가 이런 삶을 살겠습니다. 헌신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자식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 자식을 하나님 앞에 바치겠다”는 믿음의 결단으로 기도했다고 하면 그 기도의 제목들을 잊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우리는 인간이 죄성이 많기 때문에, 정말 신실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고 할지라도 나중에 가서 자신의 그 헌신과 다짐들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직분자로 세움을 받을 때, 집사로 세움을 받고 권사로 세움을 받고 장로로 세움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다짐하며 엎드립니다. “하나님, 내가 이러한 직분을 맡게 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철저하게 살겠습니다. 정말 교회에 유익이 되는 삶을 살겠습니다. 정말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겠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하면서 헌신하며 임직하게 되는 것인데, 또 목사가 될 때에도 정말 하나님 앞에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간구하며 서원하면서 임직을 받는 것인데, 그렇게 그 당시에는 정말 마음이 순수하고 열정적이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할지라도, 우리 인간은 너무나도 죄성이 많아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가게 되면 결국 나의 자존심을 내세우기 쉽고 내 주장을 하기 쉽고, 교회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교회를 더 힘들게 만드는 그런 악역을 맡는 사람들로 변하게 되는 모습들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이 보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나는 잊지 아니하고 젖을 뗀 후에 어린 사무엘을 데리고 엘리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사무엘을 드립니다. 사무엘상 1장 26절부터 28절의 말씀을 보니까 이렇게 기록합니다.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한나는 자신이 했던 그 기도를 그대로 기억했고, 자신이 맨 처음에 하나님 앞에 가졌던 그 순수한 마음을 나중에도 똑같이 기억하면서 그 서원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갚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믿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이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이고, 어쩌면 가슴이 찢어지고 미어지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시행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 15편 4절 말씀에서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며,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가 누구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는 자”가 주의 성산에 설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정말 이 한나의 마음이야말로 주의 성산에 가서 설 수 있는, 주의 장막에 합당한 자로 서 있는 한나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이 아이를 놓고 가는 것, 이 아이를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이 정말 마음이 아프고 상하고, 그리고 미어지는 일이라고 할지라도—그것 때문에 약속을 없던 것으로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그 서원을 갚는 그 대단한 믿음의 모습들이 오늘 이 성경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그 서원을 갚는 것은 결단코 해로운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서원을 갚는 것은 물질적인 손해를 보는 것일 수도 있겠고, 내 시간의 손해를 보는 것일 수도 있겠고, 아이를 하나님 앞에 바친다고 한다면 그만큼 내 가슴이 미어질 만큼 아픈 그런 상황이 되기 때문에 너무나도 힘든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해로운 것이 아니라—세상 사람들이 바라볼 때는 미련한 일이요 손해 보는 일이요 해로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복된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나는 그렇게 자신이 갖고 싶었던 그 아들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 바쳤는데, 그렇게 바침으로 말미암아 한나가 손해를 보았는가, 해가 되었는가 생각해 보면 그게 아니에요. 사무엘은 만일 엘가나의 집에서 그냥 있었다고 한다면 그냥 평범한 인간이 되었을는지 모르겠지만, 사무엘은 하나님께 바쳐져서 위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인 지도자로 세워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어마어마한 지도자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손해가 아니요 축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무엘상 2장 21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한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사무엘 이후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큰 축복이요 은혜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함께 기억하는 이 시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오늘날 우리는 이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을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원하면서 자식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하신 분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마도 믿음이 있는 부모님들이라고 한다면 한 번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런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우리 자식들 가운데서 우리 장자를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우리 장녀를 사모의 길로 가도록 만들겠습니다.” 어쩌면 우리들 가운데 수많은 성도님들 가운데 정말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다고 서원하며 기도하신 분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어떠한 결과가 만들어졌냐면, 신학교에 가면 수많은 신학생들이 있고 “왜 신학교 왔냐”고 물어보면 그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하다 보면 “부모님이 나를 위해서 서원했기 때문에 왔다”고 대답하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자기가 서원해서 오게 되었다”고 하는 분도 있고, 신학교에 가면 그렇게 서원 기도 때문에 결국 신학교에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신학교에 와서 훈련을 받고 목사가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사가 되었는데, 아마 우리 교회 교인들의 가정들마다 목사가 적어도 한 명 정도는 있는 가정들이 대부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말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 목사들의 숫자가 과잉 공급되는 것을 굉장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목사들이 공급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합니다. 마틴 루터가 1517년인가요? 예, 1517년에 비텐베르크 성 교회에서 95개 조의 반박문을 붙여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썩어져 가는 그 교회로부터—개혁을 일으킨 지 500주년이 되는 해가 바로 지금 2017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중세 시대 때 어떠한 일들이 있었냐 하면, 신부가 넘쳐나는 시대였어요. 신부들이 바글바글하고 수녀들이 바글바글하면서 정말 수많은 성직자들이 넘쳐나는 시대가 바로 중세 시대, 교회가 썩어져 가던 그 시대의 현상이었는데,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현상이 마치 500년 전 그렇게 성직자들이 넘쳐나는 그 시대를 똑같이 닮았다고 분석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실은 “목사로서 과연 이 사람이 자질이 있는 사람인가”라고 하는 사실을 굉장히 의심할 수 있는 사람들도 신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고 목회자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교회에서는 일할 수 있는 성도들, 평신도들의 숫자는 날로날로 줄어가고 있는데, 목사들의 숫자는 자꾸만 넘쳐나고, 그래서 사실은 이제는 교회에서 사역을 하지 못하고 그냥 다른 일들을 해야만 하는 목사들의 숫자가 넘쳐난다고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한 해에 목사 안수를 받는 사람의 숫자가 5천 명이 된다고 하니까, 10년이면 몇 명이죠? 5만 명, 그렇죠? 20년이면 10만 명. 제가 왜 이렇게 숫자에 약해졌는지 모르겠어요.
어떤 분은 제게 질문을 던져요. “그렇게 교역자들이 많다고 하는데 왜 우리가 교역자를 찾으려고 하면 교역자 찾는 것이 그렇게 힘들고 어렵습니까?” 사실 우리도 교역자가 필요해서 교역자를 찾으려고 하고 있는데, 교역자 찾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교회들이 경험하는 문제인데요. 그것은 아마도 우리나라의 산업 현장, 직장 현장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각각의 젊은이들은 일자리가 없다고 하소연하고 있는데, 정작 산업체나 회사들에서는 직원을 구할 수가 없고 일할 사람들이 없다고 아우성하는 상황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지금 현재의 상황을 살펴본다면, 지금 신학생들—교육전도사들의 숫자—는 굉장히 많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교회가 그만큼 교육전도사가 갈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보다 교회의 숫자가 훨씬 더 많기 때문에, 교육전도사를 구하는 것은 정말 하늘의 별 따기가 될 정도로 너무나도 힘든 상태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갓 목사 안수 받은 젊은 목사들의 숫자도 너무나도 부족해서 각 교회에서 부목사를 찾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조금만 더 지나고 나면 역전이 되어 버리는데, 30대 후반이 되고 나면 이제는 더 이상 사역할 수 있는 교회가 없습니다. 그 어느 교회도 30대 후반 이상, 40대의 목사들을 환영해 주는 교회들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육전도사 시절 때는 정말 금값이 되어서 교회를 찾아가고 있지만, 한 30대 중후반 넘어가면서부터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목사들이 넘쳐나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 오늘날의 문제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 들리는 이야기가, 이제는 그 나이가 되면 다른 직업으로 전직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아무튼 교회에서 일할 성도들은 날로날로 부족해 가는데, 목사들의 숫자들은 많이 넘쳐나고 있는 이런 문제들, 그리고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목사가 되려고 하는 상황 가운데서 사실은 제대로 검증되지 아니하고—인격의 검증이 되지 아니하고—또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는 사람들이 무자격자로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지거나 목회자로 배출되는 아주 심각한 문제들이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그런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나라 성도들의 대부분이 하나님 앞에 한 번쯤 기도하면서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하는 그런 서원 기도를 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서원에 따라서 목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결국 이런저런 압력을 받아 목사가 되는 길로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목사가 되는 것은 본인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내적인 부르심에 대한 확신도 있어야 되지만, 내적인 부르심의 확신만 있어서는 안 되고, 교회로부터 과연 그 사람이 목사로서의 자질이 있는지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목회자가 되어도 괜찮은지 평가를 받은 이후에 제대로 된 목회자를 길러내야만 하는 것인데, 그런 시스템들이 망가져 버려서 그저 “내가 하겠다”고 하면 목회자가 배출되어 버리는 현세대의 모습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던져보고 싶은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목회자로 우리 아이를 바치겠다”고 했다면, “하나님의 종으로 우리 아이를, 우리 딸을 바치겠다”고 서원을 했다면, 그러면 그 사람은 반드시 목회자의 길로 가야만 하는가의 문제를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장님은 우리나라에서 참 잘나가는 회사의 사장님이신데, 현재 교회의 장로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어느 날 제게 한 번 질문을 던졌습니다. “목사님, 사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서원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장자를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다고 서원하며 기도해서 내가 태어났고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과연 내가 이 사업을 그만두고 목회자로 가는 것이 옳을까요? 아니면 그 서원 기도를 무시하고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이 좋을까요?” 하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분은 사업을 하는 데 굉장한 달란트가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신앙도 아주 좋은 분이셨기 때문에 장로님까지 되신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 그분은 목회자로서 자질은 없다고 판단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부모님이—그분이 어렸을 때였는지 태어나기 전이었는지 정확하지는 모르지만—그분을 놓고 기도를 한 겁니다. “우리 가정의 장자는 하나님 앞에 드리겠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초태생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우리 장자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하고 그것을 위해 항상 기도하며 태어나고 자라고 양육했던 그 아이인데, 목회자의 길로 가지 아니하고 일반 사업을 하는 것에 대해서 본인이 약간의 죄책감도 느끼고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자신이 목회자적인 자질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혼란스러워서 제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럴 경우 서원을—부모님의 서원에 따라서—목회자의 길로 가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그 서원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지키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저는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저는 그분에게 “목사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서원, 우리들의 기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변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원을 하거나 기도할 때는 온전한 상태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판단력이 부족하고 욕심도 많고 죄성도 많은 우리가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했던 서원이 어떻게 했던 것이든 무조건 행해야 하는 절대적인 하나의 원칙이 되느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면서 점점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기도하시면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내 기도 제목을 가지고 내 주장을 끝까지 밀어붙여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입니까”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한다면 그 하나님의 뜻에 우리들의 욕심과 판단과 생각들을 복종시키는 것이 바른 성경적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난 다음에는 그 기도를 중단했습니다. 내 자신의 뜻을 하나님 앞에 관철시키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순종해 나가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 기도의 과정이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그 ‘육체의 가시’를 없애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하게 엎드려 사역해 나가는 것이—“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았을 때,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순종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서원하는 기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원이 하나님의 뜻대로 맞는 서원 기도가 되기보다는,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욕심에 따라, 이기적인 생각에 따라, 우리의 생각에 따라 하나님 앞에 서원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서원을 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가운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우리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입다라고 하는 사사는 섣부른 서원을 했습니다. 그래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 사사기의 말씀을 읽으면서 “입다는 서원을 했고, 그 서원이 섣부른 서원이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 서원했기 때문에 무조건 지켜야 했다”는 것을 보면서, 그 입다의 서원을 갚는 것이 마치 우리에게 모범적인 사례인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사기라고 하는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을 잘하고 있는 모범 사례를 제시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고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그 당시에 왕이 없으므로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멋대로—행하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지 아니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보기에 좋은 대로 행했던 것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사사기의 그 입다의 서원은 우리에게 모범적인 것으로 제시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서원을 갚아야 한다’는 근본적인 메시지는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실제적인 각론에 들어가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죽여 제사 드리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그 하나님의 성품을 알지 못하고—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가지고 자신의 딸을 희생시켜 버리는 어리석은 결단을 보여 준 것이 사사기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것은, 우리의 욕심에 따라 한 번 서원했지만 안 갚아도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오늘 졸다가 집에 가셔서 “우리 목사님이 그러는데 서원 안 갚아도 된다더라”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말 큰일 납니다. 졸지 마십시오. 우리의 욕심에 따라—화장실 가기 전과 후의 그런 얄팍한 이기적 욕심에 따라—한 번 했던 서원을 쉽게 변경해도 괜찮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서원했으면 가능하면 지키려고 할 것이고, 정말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기도하면서 그 서원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고 결단하고, 나의 것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라도 서원을 갚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만일 우리의 기도 제목이나 서원의 제목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하나님, 우리가 어리석게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했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내 서원을 바꾸기를 원합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저 여자랑 결혼해서 저 여자를 행복하게 만들겠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서원하면, 저 여자랑 무조건 결혼을 해야 되는 것일까요? 아니요. 결혼은 일방적인 한 사람의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에게도 똑같은 결단과 마음이 있을 때 결혼이 가능한 거예요. 어떤 한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았는데, 하나님이 당신과 결혼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그 여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전혀 안 들었다면 결혼은 성사되지 않는 거예요.
자녀들에 대한 서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아내가 서원했지만 그 서원을 남편이 허락하지 아니하면 갚을 필요가 없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서원이라는 것이 내가 내 마음대로 서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동의를 얻어야 서원이 가능한 것이 구약 성경의 가르침인 것처럼, 자녀들에 대한 서원이라면 역시 자녀들도 하나님으로부터 같은 은혜를 받아 “나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주님 앞에 헌신하기를 원한다”는 마음이 자녀의 마음에도 있어야 하고, 또한 그 자녀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평가가 “저 사람은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외적인 증거까지 같이—삼박자가—맞추어질 때 목회자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는데, 본인의 마음에도 없고, 교인들의 마음에도 “저 사람은 목회자 될 재능과 달란트가 아무것도 없다”는데, 그저 부모의 욕심에 따른 기도 제목에 따라서 신학교로 갔다가 결국 못된 목사가 되어 교계를 흐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본인에게도 큰 손해일 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교회에도, 하나님의 나라에도 큰 해악이 되는 결과가 빚어지게 될 것입니다.
서원을 하려면 자기 자신이 서원을 하지, 왜 자식을 놓고 서원을 해서—우리의 인생을 놓고 서원을 해야지—남의 인생을 놓고 서원할 것은 아닙니다. 부모가 서원을 했어도 자녀들이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야 하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들의 평가가 “목회자의 길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평가가 동시에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시험에도 합격해야 되고 신학교 과정을 통과해야 되고, 그 모든 목회자의 과정을 거쳐야 그 길로 갈 수 있는 것이지, 모든 것이 다 일방적인 결단으로 이루어질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친다는 것을 그저 어떤 사람을 목회자로, 사모로 바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가 목사가 되었다고 말하고, 사모가 되었다고 말하고, 어느 누가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집사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들을 우러러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서도 목표가 장로이신 분들도 계세요. 목표가 권사이신 분들도 계셔요. 그런데 우리가 무엇이 되는가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교회 내에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느냐가 결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몸에 비유되고 있는데, 몸의 여러 지체들 가운데 어느 부분이 다른 어느 한 부분보다 더 소중하거나, 어느 한 지체가 다른 지체보다 덜 소중한 것이 없이 모든 지체가 다 똑같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목사가 되면 무엇을 합니까? 제사장이 되면 무엇합니까? 사무엘서의 말씀을 보면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엘리 대제사장의 아들들이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도 역시 제사장이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 제사장이었는데, 이들은 일반 평신도가 아니라 제사장이었으니, 그러니까 이들은 정말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아니요. 이 사람들이 행한 행동은 악한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제사를 모욕하고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악당들이었고, 성전에서 일하는 여인들을 욕보인 아주 파렴치한 사람들이 바로 홉니와 비느하스였습니다. 그렇게 악한 제사장이라도 제사장이 되면 장땡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직분을 가지느냐—목사가 되느냐, 사모가 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제대로 바친 삶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목사가 안 되고 장로가 안 되고, 집사가 안 되고, 권사가 안 되어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신실하게 수행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 나간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하나님의 귀한 백성인 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약 성경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 모두가 다 제사장들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이요, 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순종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어떠한 사람이 되느냐가—어떻게 하나님 앞에 헌신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내가 어떠한 직책을 가졌느냐가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롯 유다를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는 이야기를 들은 가롯 유다처럼,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차라리 목사가 되지 아니하였더라면, 차라리 장로가 되지 아니하였더라면, 차라리 권사가 되지 않고, 차라리 집사가 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게 유익할 뻔하였느니라” 그런 평가를 들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어떠한 직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도 단순히 무엇이 되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사는 아이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목사만 되면 다 되는 줄 알고, 장로만 되면 다 되는 줄 알고—그것이 우리의 면류관인 줄 알고—아니에요.
마지막 날에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아가서 말할 겁니다.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아마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주님, 우리가 이 지상에 있을 때 내가 목사였습니다. 내가 장로였습니다.” 그러한 직책들을 아무리 이야기한들, 우리 주님께서 그 장로라는 직분, 목사라는 타이틀을 보시고 “그래, 네가 목사였구나” 환영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바라보시면서, 우리의 중심을 바라보시면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 앞에 신실하게 살았는가—아무도 보지 않는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았는가, 남들이 알아주지 아니하는 그 상황 가운데서 정말 거룩하게 자신을 드렸는가—그 모습을 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치는 삶은 고통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 삶은 쉬운 삶이 아닙니다. 3살이라고 하면 가장 예쁠 때예요. 우리 아이들이 3살 때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때야말로 정말 예쁘고 정말 사랑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3살짜리 아이를 엘리 제사장에게 놓고 뒤돌아서야만 하는 한나의 마음을 아십니까? 그때 사무엘이 “엄마, 같이 가” 안 그랬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한나가 하나님 앞에 그 아이를 바치고 돌아섭니다. 주님 앞에 바치는 그 삶은 쉬운 일이 아니고, 정말 가슴이 미어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고통의 길이고, 슬픔의 길이고,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드릴 믿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드리며 헌신할 수 있는 귀한 믿음의 결단이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향해서 서원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그 이래로 “너희를 구원해 주겠다”고 약속하신 그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 아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울부짖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한나가 그 아이의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그냥 지나쳤던 것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도 그 아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면서까지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그 놀라운 구원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그 크신 약속을 이루시고 희생하시고 우리에게 크신 사랑을 베풀어 주셨던 것을 기억하면서—오늘도 주님 앞에 헌신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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