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꿑 같으나 나중은 쓰다 (잠 5:1-23)

성은 더럽고 악한 것이기에 멀리해야만 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만드신 창조의 질서는 완벽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요. 천지를 창조하신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 만드신 온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보시기에 좋다고 그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모든 것들이 정말 보기 좋고 아름답고 선하게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을 선언하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단순히 물질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법칙들도 함께 만드셨습니다. 아마 시간의 탄생이라든가, 그리고 여러 가지 법칙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법칙들도 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만들어 놓으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이렇게 계절의 변화가 있는 것 그리고 여러 가지 삶의 그 과정들 그 모든 것들 자라나고 하는 그 모든 법칙들이 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만들어놓은 것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은 지혜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지혜로우신데. 그 지혜가 완벽해서 정말 우리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고 우리가 도무지 따라갈 수도 없는 그런 고차원적이고 완벽한 지혜 가운데서 이 세상을 만들어 놓으셨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에 반해서 우리들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미약한 것이죠. 아무리 똑똑해도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갈 수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장 25절에서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하나님에게 어리석음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에게 약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가정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에게 있어서 어리석은 면을 찾는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지혜로움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이고 아무리 하나님의 약함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님의 약함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강함보다 훨씬 더 더 강하다고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면서 이 천지를 만드신 이 세상에게 주어진 그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잘 따르고 순종할 때에 그것이 복된 것이지 그것을 우리가 어기고 우리가 그것을 배척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우리들에게 결코 유익하지 않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여러 가지 질서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여러 가지 법칙들을 우리가 거역할 것이 아니라 순종해야 되는데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법칙을 거역하게 된다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파멸에 이르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태초의 규례들, 하나님께서 태초에 만들어 놓으신 법 법칙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요. 어떤 것들을 들 수가 있을까요? 첫 번째는 노동의 규례를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리고 그 만드신 인간들을 향해서 일하도록 노동을 하도록 명령해 주셨는데 우리가 이 땅을 다스리고 또 가꾸고 하는 것들을 이렇게 노동을 하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인 것이고 그러한 노동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들의 우리 됨을, 우리들의 자신을 성취할 수가 있고 보람을 느낄 수가 있고, 그 노동의 대가를 얻을 수 있는 그런 노동의 규례를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규례가 있는데요. 안식의 규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만드시고 계속 일만 하도록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일을 하다가 일주일에 한 번은 쉬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안식의 규례입니다. 우리가 일을 많이 하면 더 많은 것을 고 더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지 않으셨어요. 쉬게 만드셨고 쉼을 통해서 재충전을 하고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고 또한 우리가 쉼으로써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그렇게 우리의 우리에게 주신 그 법칙이 계속 일만 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쉬도록 만들어 놓았다고 하는 것도 태초에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귀중한 규례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규례를 찾아본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결혼의 규례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래서 그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묶어서 가정을 이루도록 만들어 주셨는데요. 가정을 통해서 자녀들을 생산하게 되고 또한 가정을 통해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서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돌보는 가운데 서로 영적인 성숙을 하게 되고 정말 사랑을 느끼게 되는 그런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서 살게 만드신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정해놓으신 창조의 규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이 태초의 세 가지 규례를 잘 지키면서 사는 것이 유익한 것이고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일을 하는 것이 보람이 있는 것이고, 일만 할 것이 아니라 쉬어야 하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어서 사는 것이 그 가정의 테두리 안에서 사는 것이 유익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 규례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여러 가지 잘못된 주장들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무엇이냐면 금욕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금욕주의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아주 참 매력적으로 생각하고 “금욕주의야말로 정말 고상한 것이다. 정말 영적으로 뛰어난 것이다”라고 착각해서 금욕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원래 금욕주의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적 전통 통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헬라 철학에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헬라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성속 이원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육 이원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헬라 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영적인 것은 고상한 것이지만 물질적인 것 육체적인 것 이런 것들은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성속 이원론 또는 영육 이원론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러한 육신의 것들 물질의 것들은 자꾸만 제어하고 억제하는 것이 좋고 우리가 그저 정신적인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고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영육 이원론을 헬라 철학이 가지고 있었는데요. 기독교 전통 가운데서도 이런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그래서 우리의 삶을 생각할 때 어떻게 생각하냐면 금욕주의를 실행하는 것이 그것이 마치 고상한 것이고 뭔가 영적인 차원에서 높은 차원에 올라가시는 거라고 하는 그런 착각들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금욕주의가 뭐죠? 금욕주의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욕망들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을 제어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적으로 무엇인가 더 고상해지려고 하는 것이 금욕주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인간에게 있는 욕구들이 어떤 욕구가 있습니까? 식욕이 있죠. 배고프면 무엇인가를 먹고 싶어 하는 그런 식욕이 있는데, 이 식욕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참 1차원적이고 더러운 것이고, 정말 고상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음식을 소식하거나 아니면 금식하는 것이 정말 위대한 분이다. 금식하는 사람은 정말 영적인 높은 차원에 있는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금욕주의의 생각인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어떤 욕구가 있습니까?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이죠. 사람들은 말을 하면서 삽니다. 말을 하면서 사는데, 그런 욕구를 억제해서 침묵의 수행을 하는 거죠. 수도원에 들어가 가서 하루 종일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겁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을 딱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고 묵언의 수행을 하는 그런 훈련법들이 많이 개발되어 있는데 그렇게 침묵을 하고 묵언을 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야말로 정말 고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금욕주의가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는 어떤 욕구가 있나요? 성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욕을 발산하는 것은 아주 더러운 일이고 이것은 정말 육체적인 일이고 정말 고상하지 못한 일이고 이것을 억제해서 정말 내가 정말 이성을 전혀 바라보지 않고 독신으로 살거나 그래서 내가 결혼하지 않고 살거나 그렇게 혼자 독신의 삶을 사는 것이 정말 고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금욕주의, 이런 우리 금욕주의 전통 가운데 있는 것이죠. `그래서 신부 같은 경우에는 독신으로 또 수녀 같은 것은 독신으로 사는데 그렇게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보다 정말 무엇인가 고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사람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물질에 대한 욕심이 우리 사람들에게 있는데요. 물질을 가지지 않고 무소유의 삶을 살고 거짓처럼 살고, 모든 황금 보기를 돌과 같이 하면서 아무런 물질에 대한 욕심 없이 다 버리고 그냥 청빈의 삶, 무소유의 삶,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고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금욕주의의 영향들이 기독교 안에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쾌락을 없애버리는 거고, 그래서 고행을 하는 겁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계속 순례를 하거나 아니면 절벽 위를 오르면서 그 고통스러운 것을 끝까지 견디어 내는 것이 그것이 뭔가 고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요. 또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몸에 왜 칼을 대서 피를 흘리기도 하고 하면서 자신의 육체에 고행을 가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가는 길이다. 영적으로 더 고상해지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순례의 길이라고 하고 해서 먼 거리를 정말 긴 길을 혼자 외로이 걸어가는 그 과정을 통해서 힘들고 어렵지만 조용히 그 길을 걸으며 그리고 목마르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지만 그것을 꾸준히 참으면서 그 고행의 길을 걸어가면 묵상하는 것이 정말 영적으로 뛰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고요.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보다는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살거나 나무 위에 올라가서 혼자 있거나 아니면 굴속에 들어가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그렇게 있는 그런 금욕주의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장 고상한 영적인 경지에 올라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경향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가 어렵잖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말하지 않고 살 수 없고 먹지 않고 살 수가 없고 또한 물질을 가지고 살 수가 없는데 정말 금욕주의적인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존경스러워서 그런 사람들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영적으로 무엇인가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이 성경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그러한 것을 권면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이 모든 것들이 보시기에 좋았다 말씀하시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우리들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다스리고 통치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주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제일된 목적이 무엇인가? 정말 고통스럽게 사는 것이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즐기고 만끽하고 누리는 것이 그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목적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금욕주의가 마치 정말 신앙의 높은 경지라고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금욕주의에 매력을 가지게 됩니까?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심 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잖아요? 욕심부리는, 돈에 욕심부리는 사람, 또는 명예의 욕심부리는 사람, 온갖 걸로 욕심부리면서 서로가 아웅다웅거리면서 서로 싸우는 그런 삶에서 볼 때 그러한 욕심을 다 내려놓고 그러한 욕심을 다 내려놓고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정말 존경스러워질 수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성경적으로 바른 가르침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규례를 만들어 놓으셨는데 태초에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리고 결혼이라고 하는 규례를 통해서 두 사람이 하나가 되도록 결혼의 규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결혼해서 사는 것은 남편과 아내가 만나서 결혼해 사는 것은 아 저건 세속적인 사람이야 정말 더러운 사람이야.’ 그렇게 비난할 게 아니고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정말 수도하면서 사는 그런 사람이 정말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라고 그렇게 칭찬할 게 아니고 결혼은 하나님께서 만들어오신 태초의 창조의 규례란 말이에요. 이것을 통해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면서 살면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고,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좋은 가정을 만들어가면서 하나님의 그 풍성하심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 결혼의 규례라고 할 수가 있겠고요. 이것은 마치 꽃이 피는 것처럼 우리 인생이 혼자 살다가 함께 결혼해서 아름다운 가정을 만드는 것은 정말 인생의 황금기와 같은 그런 모습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독신의 은사를 주신 경우가 있어서 굳이 결혼하지 않고도 혼자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도 가능하고 성경에서 그런 독신의 은사들이 주어져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적인 법칙, 아주 특수한 사람들 예를 들어서 나실인과 같은 사람들 이런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부르신 사람들은 그렇게 특별하게 구별돼서 독신으로 살아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또 특별하게 구별이 돼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길로 그렇게 특별하게 부르는 사람들이 종종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이루어서 만나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고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창조의 규례를 따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결혼 자체가 창조의 규례이기 때문에 결혼해서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나쁜 것이다. ‘아이고, 저것은 참 세속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라고 비난할 게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그런 원래의 목적 원래의 방법을 우리가 수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우리가 경계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금욕주의의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들어가면 안 되는 겁니다. 금욕주의, 금욕주의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그 범주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죠.

그런데 잘못된 가르침이 금욕주의가 있는가 하며는 금욕주의와는 정반대 되는 경향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그것은 쾌락주의입니다. 쾌락주의. 하나님께서 주신 정상적인 바른 삶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서 이루는 것이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창조의 규례인데 그것을 부정 정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한쪽은 금욕주의로 나가는 방향이 잘못된 방향이 하나인 반면에 또 하나의 방향은 뭐가 있냐면 쾌락주의의 방향이 있는 거죠. 쾌락주의는 뭡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테두리를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그 창조의 규례 밖으로 튀어 나가서 마음껏 즐기고자 하는 것이 쾌락주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다 마찬가지로 이런 쾌락주의가 나타날 수가 있겠는데요. 조금 전에 제가 금욕주의가 모든 분야에서 금욕주의가 생길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쾌락주의도 모든 분야에서 테두리를 벗어난 쾌락주의들이 만들어질 수가 있겠는데 특별히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 쾌락주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결혼이라고 하는 테두리를 벗어나서 문란하게 성을 사용하는 것이 쾌락주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테두리가 무엇이냐면 가정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과 한 사람이 서로 결혼의 관계 가운데서 서로 사랑하고 산다고 하면 그 가정이라고 하는 테두리 안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되고 그리고 사랑이 깊어지고 영적인 성숙이 일어나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겠는데 그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그 테두리를 벗어나서 마음껏 쾌락을 즐기는 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죠.

그것은 쾌락주의로 나가게 되면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은 파멸로 이끌게 되는 것이죠. 제가 서론을 아주 길게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 읽은 잠언서 5장의 말씀이 바로 그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겁니다. 오늘 읽은 잠언서 5장의 교훈을 한마디로 요약하자고 한다면 무슨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까? ‘음녀에게 빠지지 말라.’ 이 말입니다. 주로 구약 시대 때는 남성 위주로 모든 걸 써 때문에 음녀라고 표현을 했습니다마는 아무튼 이 말을 우리 현대적으로 우리가 생각한다고 하면 정상적인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누리는 그 삶을 벗어나서 결혼의 관계를 벗어난 성적인 타락으로 나아가지 말라고 하는 교훈이 오늘 잠언서 5장의 교훈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정당한 결혼의 관계 안에 있는 그런 배우자가 아니라 정당하지 않은 그런 불륜의 관계로 넘어가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소위 불륜의 관계는 달콤해 보인다고 해요. 주로 이렇게 부부가 가면은 별로 사랑스럽지 않아 보이는데 불륜 관계가 가면 그렇게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보인다 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불륜의 관계로 넘어가게 되면 달콤해 보일 수가 있겠지만 그 끝은 결국 파멸이 될 것이다. 쑥과 같이 쓴 맛을 내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그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해로울 뿐만 아니라, 우리 배우자에게도 해롭고,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엄청난 큰 상처를 주는 정말 무서운 일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되는가?

성이라고 하는 것은 금욕할 것도 아니고, 그리고 무분별하게 자유분방하게 함부로 사용할 것도 아니고, 가정의 테두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의 교회 안에서 지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잠언서 5장 18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 샘으로 복되게 하라. 내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정당한 결혼 관계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의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면서 사랑을 키워나가고, 그 사랑을 누리는 그 우리들의 삶, 저 바깥 샘이 아니라 우리 샘 안에서 서로 그 샘물을 마시면서 그 사랑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이 행복을 찾아 나가야 된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겁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배려해 주고 서로에게 정말 서로를 기뻐해 주는 일을 하게 된다고 한다면,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것보다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정말 행복한 가정을 이룰 때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창조의 규례 가운데서 우리가 복을 누리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지 않고 가정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성경에서 금하는 그런 잘못된 방식으로 정당한 관계가 아닌 불륜의 관계로 넘어간다면 정당하지 않은 그런 이성과의 관계로 넘어가게 된다고 하면 그것이 처음에는 달콤할 수 있고 처음에는 좋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온 가족을 파멸로 이끌게 되고 모든 고통이 있게 되는, 정말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이제 고백을 좀 하자면 저는 사실 좀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결혼하고 나서 결혼하고 나서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를 위해서 뭐든 참 희생하고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옳겠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너무 어리석었죠. 제가 너무 어리석었습니다. 제가 아직 어렸을 때 우리 어머니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그래서 어머니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으니까, 저는 마치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을 했어요. 사랑을 하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하는 그런 생각이 저의 마음 가운데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했으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되는데 제가 사랑을 잘 못했어요 사랑을 베풀어줘야 되는데 사랑을 베풀지를 못했어요. 그러면서 제 마음 가운데 무슨 생각이 있었냐면, ‘내 아내가 나를 사랑해줘야 된다’라고만 생각했어요. 제가 사랑할 생각은 못하고, 사랑, 나를 사랑해줘야 된다라고만 생각을 한 거예요. 왜? 우리 엄마가 나를 사랑해 주었듯이 우리 아내도 나를 사랑해 줘야 되는데, 자꾸만 비교가 되는 거예요. 엄마는 나를 많이 사랑해줬는데, 왜 내 아내는 나를 사랑 안 해줄까? 우리 엄마는 아침마다 나에게 밥을 챙겨줬는데, 왜 내 아내는 신경을 안 쓸까? 그러니 결혼 생활이 행복했겠습니까? 행복하지 못했겠습니까? 행복하지 못했어요. 왜? 제가 이기적이어서 사랑을 베풀지 않고,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니까 결혼 생활이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너무나도 많이 싸우고, 왜 이렇게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됐었는데, 잘 이해를 하지 못했어요. 그때 제 어렸을 때 젊었을 때의 생각은 제 아내가 나를 충분히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제가 미국에 가서 충격적인 광경을 하나 봤습니다. 노회 목사님들끼리 송년 모임을 하기 위해서 송년 모임 장소에 파티에 모였는데요. 어느 한 중국집을 대절해 가지고 목사님들 부부가 다 와서 송년 행사를 하는 그 자리였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가서 앉아 있는데, 그 자리에 누가 오셨냐면, 연세 많으신 노 부부 목사님이 오시는 겁니다. 머리가 하얗고 정말 이미 은퇴하신 지 정말 오래되신, 노 부부 목사님께서 들어오시는데 그 목사님이 들어오시더니만 의자를 빼서 사모님을 앉혀 드리고 사모님의 외투를 받아서 걸어 드리고, 그 사모님에게 정말 잘 대해주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제가 충격을 받았어요. ‘저렇게 하는 거구나.’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제 아내가 나를 왜 사랑 안 해주나? 왜 내가 원하는 걸 안 해주나? 그 생각을 가지고 늘 불만 가운데 살았었어요. 그래서 너무나도 힘들었었어요. 그런데 어느 한 날 그 모습을 보면서 ‘아, 저렇게 해야 되는 거지’ 그걸 봤어요. 그리고서 그다음부터는 제가 제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차에 타려고 하면 제가 문을 열어서 제 아내를 먼저 태우고 문을 닫아주고 그리고 내가 가서 운전하고 가고 내릴 때 내가 먼저 내려서 문을 열어서 나오게 하고 어디 간다고 하면 문을 먼저 열어 주고 어디 앉는다고 하면 의자 꺼내서 앉혀주고 그때부터 제 삶이 조금씩 조금씩 바뀌었는데 물론 지금도 완벽하지 않고, 지금도 서툽니다. 서툰데, 서툰데, 그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사랑을 베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가 너무 좋아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제가 행복한 거예요. 전에는 왜 나한테 사랑을 안 베풀어주나? 왜 나에게 잘 안 해주나? 생각할 때는 그렇게 힘들고 그렇게 너무나도 괴롭고 같이 사는 것이 너무나도 막 힘들어서, 서로 싸우고 정말 가정이 지옥과 같은 그런 삶을 정말 많이 살았었는데 그런데 제가 사랑을 베풀기 시작하니까 제 아내가 좋아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도 행복한 거야 사랑을 베푸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내가 사랑을 받는 것보다 내가 사랑을 베풀어주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구나, 그걸 깨닫게 된 거예요.

오늘 성경 말씀은 뭐라고 가르치냐면 남편과 아내가 그 같은 물에서 그 샘으로 복되게 하고 그 아내를 즐거워하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오늘날 수많은 가정들이 어떻게 하냐면 그 가정의 사랑이 메말라 가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사랑이 식어져 버리고 그리고 불만은 가득 쌓여 버리고 ‘왜 아내는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지 않나?’ ‘왜 우리 남편은 나에게 잘해주지 않나?’ 불평하면서 사랑이 점점 말라가 버리면서, 그러면서 결국 눈이 어디로 돌아가냐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가정의 테두리 밖으로 눈이 넘어가는 거예요. 밖에 있는 불륜의 관계가 다른 여자 다른 남자가 훨씬 더 멋있어 보이고 훨씬 더 사랑스러워 보이는 그런 관계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죠. 우리 가정에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그 가정은 하나님께서 짝 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아시는 그 하나님께서 바로 그 사람에게 바로 그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짝지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짝지어준 것은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가 부족하고 서로가 모자란 사람들이기에 서로가 서로를 채워주면서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그 그 부족함들이 채워지고 사랑하면서 점점점점 행복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그렇게 가정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기보다는 왜 나에게 잘해주지 않느냐라고 하면서 불평과 불만 가운데 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기 시작할 때 내 주변은 점점 광야로 변해가는 겁니다 내가 내 주변에 물을 뿌리면 내 주변이 옥토로 변해가는데 내가 내 주변에 사랑의 물을 뿌리지 않으면 내 주변이 점점 메말라가는 거예요.

내가 내 아내에게 내 남편에게 사랑의 물을 뿌려주지 않으면 사랑의 봉사를 하지 않으면 계속 메말라가 버려서 그래서 주변이 메말라가 버리고,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너무나도 외롭고 황량해서 그래서 그 가정의 테두리 안에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고 기쁨을 바라보지 못하면서 결국 어디를 바라보냐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가족의 테두리 밖으로 눈을 보게 될 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달콤해 보이고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보이고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로 이끌 수가 있겠지만 그러나 결국은 그것이 파멸로 가는 길이고 나중에 쓰게 된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있는 곳은 광야 같은데 우리 담장 밖에는 에덴동산처럼 보여서 그리로 뛰어나가면 거기가 에덴동산이 아니라 사실은 멸망의 자리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되고, 사실 우리의 이 말씀을 다른 이 가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말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법칙, 하나님의 규례, 창조의 규례에 우리보다 훨씬 더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그 규례에 우리가 순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가 사랑을 베풀 때 오히려 기쁨이 넘치고 행복이 넘친다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복되게 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사람들은 유교적 사상이 너무나도 깊게 뿌리 박혀 있고 남존여비 사상이 너무나도 깊게 뿌리 박혀 있어서 우리가 정말 사랑으로 돌보아야 된다고 하는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하는 성경적인 가르침을 우리가 망각해 버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기 계신 남자분들이 계시다고 한다면 해보세요. 여러분들의 아내에게 종이 되어 보세요. 이전까지 발견하지 못한 엄청난 기쁨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사랑을 베풀기로 보세요. 희생해보세요. 지금까지 깨닫지 못한 너무나도 기쁨을 큰 기쁨을 여러분들이 느끼게 해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방법이고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나아간다고 하면 정말 이 가정이 정말 지옥과 같은 가정이 아니라 행복한 가정이 되는 거예요. 미움의 과정이 아니라 우리 아내의 얼굴에서 밝은 웃음이 솟아나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 책임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내가 사랑을 베풀지 않아서 사랑의 물을 주기 중단해버려서 그래서 점점점점 우리의 사랑이 메말라가 버렸을 때 그 메말라간 게 만든 그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그 메말라버린 것이 아닌 다른 활짝 꽃 피어 있는 다른 곳을 향해서 찾아 나가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그 끝은 폐망의 길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늘 유혹 앞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 가운데 만들어 놓으신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가서 그리고 쾌락을 즐기라고 하는 그 유혹 앞에 우리가 항상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그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죠.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지난 시간에 우리가 배웠던 것처럼,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했는데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잘못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지만, 그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을 때 그것을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지혜로 다시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할 것입니다. 다윗과 같은 뛰어난 성군도 무너질 수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쉽게 잘 무너지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야 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죄성을 제거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씻어주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정말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그 아름다운 그 결혼 테두리 안에서 하나님의 그 목적 만들어가고 누릴 수 있는 그런 귀하고 복된 가정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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