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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신앙 톡투유를 마치고

어제 교인들에게 나누어준 달력들을 보면서 교인들이 감탄을 하면서 말했다. “내 평생에 신앙생활 해오면서 우리들의 사진이 들어간 달력은 처음 받아보네요.” 주문하는 사람이 원하는 사진과 디자인으로 달력을 제작하는 독판달력이 한국 땅에 소개된 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났건만 이런 달력을 처음 받아보다니? 전주가 시골은 시골인가보다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독판달력을 받아든 그 날, 우리 교회는 아마도 역시 신앙생활하면서 난생처음으로 맞이했을 독특한 형식의 “열린 신앙 톡투유”를 진행했다. 방송인 김제동이 진행하는 톡투유처럼, 서로 쌍방 간의 대화를 하는 방식은 아마도 우리 교인들의 경험 상 처음이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는 그저 강단에서 일방적으로 선포되는 메시지를 들었다면, “열린 신앙 톡투유”에서는 쌍방 간의 대화를 추구한다. 그래서 서로 대화하면서 진리를 접근해가고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것을 추구한다.

처음 하는 행사지만 모든 진행이 매끄러웠다. 타고난 사회자인 권미라 집사님의 재치 있는 진행은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고, 교인들의 참여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좋았다. 아직 성도들의 구체적인 반응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평가를 내릴 수는 없겠지만, 처음 하는 프로그램 치고는 아주 매끄러웠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런 방식의 프로그램은 우리가 처음 도입한 것이 아니다. 사실 이런 방법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방법이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가지고 접근했다. “선한 선생님,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등등 여러 가지 삶의 문제와 신앙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을 던졌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필요한 대답을 해주셨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어제 열린 신앙 톡투유를 진행하면서 나는 아직 우리 교인들이 이런 방식을 낯설어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질문을 던진 분들이 계셨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질문을 던지는 것을 망설였다. 오랫동안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던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내가 던지는 질문이 너무나도 어리석은 질문과 같아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너무 수준이 낮은 사람으로 보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우려도 섞여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세상에 나쁜 개가 없듯이, 이 세상에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것은 결코 없다. 이 점을 기억해주었으면 했다.

더 나아가 내가 대답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모두가 내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 자리에 앉아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형식이 약간 바뀐 설교를 하고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무조건 아멘 해야 한다는 메카니즘이 작용하는 것 같았다. 이러한 반응은 사실 내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이 내 대답을 듣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또 다른 질문을 해오기를 기대했다. 사실 내가 했던 대답은 완벽한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적인 진리는 너무나도 커서 짧은 시간에 간단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고, 한 편으로 대답하면 다른 문제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질문이 나와야 했는데, 추가적인 질문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한두 개의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나왔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그냥 알았다고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대답에 대하여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추가적인 질문을 던졌고,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모든 대답은 추가적인 질문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방식의 대화를 통해서 청중들도 배울 것이지만, 목회자인 나도 청중들의 생각들을 들으면서 배우게 될 것이다. 결국 또 다시 청중들은 더욱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무조건 믿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한국 기독교적 환경 속에서, 성경에 대해서 질문하고 전해진 설교의 메시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질문하는 것은 불경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베뢰아 사람들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상고하면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모른 채 멸망의 길로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년에 있을 다음 열린 신앙 톡투유를 기대해본다.

2017.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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