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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사람 (잠 12:4)

오늘 설교 제목을 어진 사람이라고 제목을 정했는데요. 이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하니까, 제가 어울리지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이름이 “어진”인 목사님도 계신데, 이름이 “어진”이 아닌 목사가 설교를 하려고 하니까 굉장히 부담스럽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설교 제목을 정해놓고, 이번 주간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만히 살펴보니까,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말 성경에서는 어진 여인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는데, 히브리어 원문을 살펴보니까, “어진” 여인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본문이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에셰트 “하일””이라고 하는 그 단어는 “어진” 여인을 의미하기보다는 “유능한” 여인 “능력이 있는” 여인을 뜻하는 그런 단어입니다. 따라서 번역을 좀 더 잘하려고 한다면,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유능한 여인은, 능력이 있는 여인은 그 남편의 면류관”이라고 하는 식으로 번역을 해야 히브리어 원문에 좀 더 가깝게 번역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왜 번역자들이 그래도 원문도 잘 알고, 성경을 잘 아는 그런 번역자들이 번역을 하면서 왜 “유능한”이라고 하는 단어가 있고, “능력이 있는”이라고 하는 단어가 있는데, 왜 하필이면 이 구절에서 “어진”이라고 하는 말로 번역을 했을까 생각을 해보니까, 아마도 그것은 킹 제임스 버전(King James Version)이라고 하는 흠정역 성경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우리 기독교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계속해서 사용되어 온 영어 성경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킹 제임스(King James)의 그 후원 하에 만들어졌던, 소위 킹 제임스 버전(King James Version)이 우리 기독교계에서 아주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영어 성경이 너무나도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수많은 크리스천들의 마음 가운데 그 킹 제임스 버전(King James Version) 성경의 표현들이 많이 각인이 돼 있었고요. 셰익스피어라고 하는 영국의 문필가도 이런 여러 가지 문학 작품을 쓰면서, 바로 이 킹 제임스 버전에 나오는 표현들을 많이 사용해서, 소설을 쓰는 등 이 킹 제임스 버전의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지대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킹 제임스 버전에서 잠언서 12장 4절을 번역할 때 뭐라고 번역을 했냐면, virtuous, 다시 말하자면 “덕이 있는” “덕망 있는” 그런 말로 번역을, 지금으로부터 한 500여 년 전에 번역을 해놓았고, 그 영향 하에서 영어 성경이든, 한국어 성경이든, 번역을 할 때, “어진” “덕망이 있는” 이런 식으로 번역을 한 것이고, 요즘 새로운 한국어 번역 성경들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그 번역자들이 예전에 자신이 자라온 환경, 그런 전통, 이것에 많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 그냥 습관적으로 그냥 번역을 하는 경향들이 있어서, 그 킹 제임스 버전의 영향 하에, “덕망이 있는” 혹은 “어진” 여인이라고 이렇게 번역을 했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비교적 킹 제임스 버전의 영향권 밖에 있는 가톨릭 쪽에서는 어떻게 번역을 했는가 하고 살펴보았더니, 가톨릭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훌륭한 아내는 남편의 면류관이지만. 수치스러운 여자는 남편 뼈의 염증과 같다”라고 번역을 해서 가톨릭 성경에서는 “어진” 아내라고 하지 않고, “어진” 여인이라고 하지 않고, 좀 더 원문에 가깝게 “훌륭한” “능력 있는” 그런 의미의 “훌륭한” 아내라고 하는 말로 번역을 했고요. 요즘 우리가 흔히 잘 이렇게 신뢰하면서 보는 영어 성경에서도 an excellent wife, 그러니까 아주 “탁월한 와이프(wife)” “탁월한 부인” “능력 있는 부인” “유능한” “아주 탁월한 그런 부인”은 자기 남편에게 면류관이다라고 하는 식으로 번역을 해 놓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어진 여인으로 번역하기보다는, 능력이 있는 여인, 유능한 여인, 혹은 탁월한 여인, 이런 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를 좀 더 밝히 번역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똑같은 단어를 창세기 47장 6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내 아버지와 내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하일“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이죠? 바로 왕이 야곱에게 한 말 가운데, 히브리어 “하일”이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해서, 능력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능력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고 하는 그런 말을 하게 되는데, 창세기 47장 6절에서는 이 단어를 “능력 있는”으로 번역을 했는데, 이상하게 잠언서 12장 4절에서는 똑같은 히브리어 단어인 “하일”을 “능력 있는”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어진”이라고 하는 말로 번역한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잠언서 31장에도 똑같은 단어가 등장하는데요. 잠언서 31장 10절 11절에 개역 성경은 무엇으로 돼 있냐면,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하지 아니하겠으며”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여기서 “현숙한”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원어도 “하일”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현숙한”이라고 하고 번역하기보다는, 누가 “능력 있는”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라고 번역하는 것이, 누가 “유능한” 여인을 찾아 없겠느냐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히브리어 원문에 가깝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잠언서 31장 29절도 마찬가지인데요.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라고 할 때도 여기서 “하일”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 “하일”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를 덕행 있느니라고, 일관성 없게, 어디서는 “어진” 어디서는 “현숙한” 이렇게 번역하기보다는, 다 “능력 있는” “유능한” “탁월한”으로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어진 사람”으로 하기보다는 “능력 있는 사람”으로 바꿔야만 할 것 같습니다. 탁월한 사람, 능력이 있는 사람, 탁월한 여인, 능력이 있는 여인, 유능한 여인은 자신의 남편에게 면류관일 것이다라고 하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니까, 펜이 있으신 분들은 좀 적어놓으셔요. 나중에 읽을 때, 제대로 잘 읽기 위해서, 아무튼 오늘 본문에서 말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아내가 유능하면, 아내가 탁월하면, 그 남편이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내가 유능하면 남편이 남편의 면류관이라고 하는 말은, 이 면류관이라고 하는 그 표현이 나타내고자 하는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면류관이라고 하는 것은 영광, 영예 이런 것을 나타내기 위한 그런 비유라고 할 수가 있겠죠. 아주 고대 시대에 쓰인 성경 말씀이기 때문에 능력이 있는 그런 여인은 자기 남편의 면류관이다라고 표현했겠지만, 만일 21세기에 잠언을 기록했다고 한다면 면류관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무엇으로 표현을 했었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까? 아마 이렇게 표현했을 것 같아요. 능력이 있는 여인은 자기 남편의 트로피니라. 능력이 있는 여인은 자기 남편의 금메달이니라. 아마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능력 있는 여인은 자기 남편을 영예롭게 한다. 영광스럽게 한다. 자기 남편을 아주 영광스럽게 만든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오늘 본문의 전반부에 나오는 내용이고요. 그 후반부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욕을 끼치는 여인은, 다시 말하자면 수치를 당하게 만드는 여인은 자기 남편에게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마치 뼈에 염증이 생긴 것처럼, 염증이 생기면 아프잖아요? 괴롭잖아요? 힘들잖아요? 자기 몸인데 자기 몸에 염증이 있으면 이거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너무 힘든 것인데, 만일 자기 아내가 수치를 끼치는 여인이라고 한다면, 욕을 끼치는 여인이라고 한다면, 정말 고통스러울 거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하반부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그 여인 중에서 수치를 끼친다, 욕을 끼친다고 하는 말은 도대체 그 여인이 무슨 일을 했을 때, 수치를 끼치게 하고, 욕을 끼치게 하는 것이 될까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이 표현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단정하지 못하게 행동한다. 조금 너무 정숙하지 못하게 행동한다. 뭔가 이렇게 좀 예의 바르지 못하게 행동한다. 이렇게 해서 욕을 먹게 되는, 그런 행동을 한다고 하면, 그러면 남편으로 하여금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 잠언서의 말씀을 보면서 항상 이 두 구절이 앞 구절과 뒤 구절이 뒤에 있는 구절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점을 늘 살펴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앞 구절이 이해가 안 되면, 뒷 구절을 보고 뒷 구절이 이해가 안 되면, 앞 구절을 보고 해서, 이 두 구절이 서로 비슷한 내용, 같은 의미의 내용을 다른 표현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제가 말씀을 드렸으니까, 여기서 수치를 끼친다, 욕을 끼친다고 하는 것은 이 여인이 그냥 방정맞게 행동해서, 단정하지 못하게 행동해서, 그래서 욕을 끼치는 것 수치를 끼치게 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오늘 문맥에서 본다고 한다면, 능력이 없어서, 뭔가 일을 제대로 잘 처리하지 못하고, 뭔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늘 망치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유능하지 못한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끼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더 맞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정리하면 어떤 의미냐면, 어떤 사람이 있는데 어떤 여인이 있는데, 그 사람이 능력이 있어서, 모든 일들을 잘 처리하고, 집안일도 아주 잘하고 아주 모든 일들을 아주 잘하는 그런 능력이 있는 탁월한 여인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자기 남편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어떤 여인이 있어서 그 사람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미숙하게 행동하고 뭔가 부족하게 행동하고, 그래서 결국 수치를 끼치는 그런 여인이 된다고 한다면, 그러면 자기 남편으로 하여금 근심거리가 되고, 고통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예.

이 말씀을 볼 때 우리들은 두 가지 정도의 질문을 던져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질문이 있다고 한다면, 왜 이 성경은 여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느냐라고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왜 성경은 여자에 대해서만 능력이 있어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가? 남자에 대해서는, 왜 남자가 능력이 있으면 아내에게 영광이 되고 그렇게 표현하지 않고, “왜 여자한테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가 있습니다.

과연 성경도 남존여비 사상에 찌들어져 있는 그런 책인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질문이 생기죠? 안 생깁니까? 생깁니다. 참 흥미로운 게, 이 히브리어 성경을 우리 한국말로 번역할 때 흥미롭게 번역을 했어요. 뭐라고 번역을 했냐 하면, 어진 여인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유능한 여인으로 고친다고 한다면, 유능한 여인은 “지아비”의 면류관이니라고 번역을 한 것이죠. 이 “지아비”라고 하는 표현이 무슨 표현입니까? 아주 고리타분이라고 해야 되나요? 아주 오래적, 고리… 아주 아주 옛날식.. 옛날식. 조선시대 때나 쓰던 표현이 여기에 나와 있는 거예요, 왜정시대 때나 쓰던 그런 표현, 남존여비로 찌드러 져 있던, 남편은 지아비고 아내는 그 지아비 밑에서 그냥 숨어서 살아야 되는, 그런 비참한 존재로 여겨지는 그 시대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고 하는 점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왜 이렇게 번역을 했고, 왜 여성에 대해서만 이렇게 딴지를 걸고 있는가? 여성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첫 번째 이유를 살펴본다고 한다면, 이 성경이 번역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번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아직 유교적인 사상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었고, 남존여비 사상이 아주 강하게 우리나라를 장악하고 있던 그 문화 속에서, 성경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할 때, 그 유생들이 번역을 하고, 남성들이 번역을, 그때는 여성들이 글도 제대로 못 읽던 시기 아니었습니까? 남자들이 남존여비 사상에 가득 차 있던 그 사람들이 유교 사상에 젖어 있던 그런 사람들이, 이제 막 크리스천이 되고, 이제 막 개종해서 그리고 성경을 번역하면서 선교사를 도와서 번역해 나갈 때, 유교적인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 성경을 볼 때 유교적으로 해석을 해서, 능력 있는 여인은 존엄하신 지아비에게 면류관이 될 수 있겠다고 하는 식으로 번역을 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번역이 시대를 흐르면서도, 이 사회가 재빠르게, 이렇게 변화가 되고, 사회가 완전히 뒤바뀌었지 않습니까? 지금은 여존남비 시대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그 표현들이 성경에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두 번째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 당시 유대사회도 남성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당시에도 솔로몬 시대에도 남성들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 자체 내에도 여성을 거의 무시해버리고, 마치 투명인간 취급해 버리고, 그리고 자 어린아이들도 거의 무시해 버리고 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성경이 쓰여 있기 때문인데요.

성경이 쓰일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전달될 때, 하나님의 언어로 우리들에게 전달이 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서 이 땅에 사람들이 쓰고 있는 말, 언어를, 언어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소개가 된 거죠.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줘야 되는데, 그 전달하는 우리들의 말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은, 정말 성경적이지 못한, 그리고 남존여비 같은 그런 사상에 찌들어져 있는 그런 문화의 언어를 가지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다 보니까, 성경 내에서도 이런 표현들이 많이 들어 있는 것이죠.

특별히 어떤 표현이 들어 있냐면, 우리가 히브리어를 다 살펴보지 않았지만, 여기서 자기 남편에게 면류관이라고 했을 때, 자기 남편이라고 하는 말이 히브리어로 어떤 표현이냐면 “바알”이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바알”이 뭐죠 바알 신 있잖아요? 바알이라고 하는 말이 남편이라고 하는 뜻이고, 또 다른 뜻으로는 주인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남편을 주인으로 바라보는 그 언어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조심스럽게 분별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조심스럽게 분별해야 되는데, 성경 속에 나타나는 그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언어로 우리들에게 말해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말을 이용해서 우리들에게 뜻을 전달해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언어라고 하는 옷을 입고, 우리들에게 전달되는 그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과 그 당시의 문화와 관습과 생각과 그 당시의 철학과 그 당시의 세계관과 그 모든 것들이 섞여서 우리들에게 전달이 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조심스럽게 무엇이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진리이고, 무엇이 그 당시에 상황적인 그리고 문화적인 표현들인가를 조심스럽게 구분해봐야, 그래야 우리가 하는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도표를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성경을 우리들에게 주셨는데, 그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뜻을 무엇으로 표현했냐면, 성경 기록 당시의 상황과 문화와 관습과 언어와 세계관과 그런 것을 옷 입혀서 우리들에게 전달해야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서 그 당시의 상황과 문화와 관습이 무엇이며,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조심스럽게 분별해야 되는 과제가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고요.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성경을 바라볼 때 우리도 그냥 객관적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렌즈를 가지고 성경을 바라보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진공 속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성경을 해석하는, 우리 자신이 이미 길고 긴 역사의 흐름 속에 결과물로서 문화와 상황과 관습과 여러 가지 것들을 가지고 있는 그 채로 성경을 바라보는 그런 렌즈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여러 가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데 어려운 그런 요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무엇인가를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아내려고 한다고 하면, 그러면 조심스럽게 구분해 보아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바라보아야 될 것은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뜻인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당시의 상황과 문화와 관습의 옷을 입고 전달되었고, 우리도 상황과 문화와 관습의 렌즈를 가지고 바라보기 때문에, 종종 성경을 오해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종종 교회 안에서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안식교 같은 곳에서는 말하기를, 그러니까 지금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등, 돼지고기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등, 그런 너무나도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당시에 여러 가지 상황들이 섞여 있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말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성경의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이 일부다처를 하고 있었으니 우리도 여러 명의 아내를 두어도 괜찮다고 주장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성경에 사형 제도가 있으니까 오늘날에도 사형 제도를 폐지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성경에서는 6일 동안 일하고 하루만 쉬라고 했으니까, 주 6일 근무를 하지 않고 주 5일 근무를 하는 것은 그것은 사악한 일이라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고, 성경에 노예 제도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노예를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그런 바보들도 있는 것이고, 성경에 남녀 차별이 있고 유별이 있고 그리고 어린이를 무시하는 거니까, 남성 중심의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하는 그런 정말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그런 무식한 사람들이 득실거리고 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고, 성경에 제비뽑기가 있으니까 오늘 또 중요한 모든 직책들을 뽑을 때, 제비뽑기로 뽑아야 그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라고 하는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주장들이 오늘날 우리 교회 내에서도 들려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몰라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그런 주장을 하면서도 왜 오늘날은 왕을 세우지 않는지는 이상해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대통령제 거부하고 우리 왕(을) 세웁시다 그렇게는 또 안 해요. 도대체 일관적이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아무튼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해석할 때, 당대의 옷을 입고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분별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능력 있는 아내는 그 남편의 면류관이라고 하는 말씀은, 그러니까 아내들더러 아내들이 잘해야 돼. 아내들이 문제야. “아내들만 잘하면 돼”라고 하는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메시지는 우리 모두에게 다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아내에게도 해당이 되는 말씀이고, 남편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고, 부모에게도 해당이 되는 말씀이고, 자녀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말씀이고, 모두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이에요. 한쪽 방향에서의 예를 들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 인간은 혼자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가족으로 연결되어 있고, 나는 나 혼자, 내가 했던 그 모든 일들이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이죠.

우리 가운데 그 누구가 사회에 나가서 나쁜 짓을 하면, 예수 비전 교회가 먹칠을 당하는 거예요. 성도라고 하는 사람이 사악한 짓을 하게 되면. 성도라고 하는 전체가 교회라고 하는 전체가 욕을 먹게 되어 있는 것이고요. 반면에 어떤 한 사람이 아주 뛰어난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고 한다면, 모두가 다 영광스럽고 모두가 다 기쁜 것이죠. 우리 요즘 우리 한국 선수들이 세계적으로 많은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손흥민 선수 같은 선수들 보면 세계 최고의 프리미어리그에서 득점왕이 되는 그런 어마어마한 그런 모습들을 보이게 됐을 때 손흥민만 기쁜 것이 아니라, 왜 나도 기쁘죠 왜 나도 행복하냔 말이에요?

저 메이저리그에서 최지만 선수가 김하성 선수가 그리고 류현진 선수가 잘하는 모습을 보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왜 우리가 기쁘냐고요? 왜냐하면 우리는 다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요.

만일 크리스천이라고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악을 행한다고 한다면, 그리고 정말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모두에게 다 불명예스러운 것이 되는 것이고 근심거리가 되는 겁니다. 누군가 정말 유능하게 행동한다고 하면 그러면 그것이 자신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다 영광스러운 일이 된다라고 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주는 것으로 기억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행동, 우리의 생각, 됨됨이는 그 모든 것이 나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영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여자만 잘해라는 것이 아니고. 누가 잘해야 돼요? 다 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은 결국 그 배우자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고 수치심을, 수치를 유발하는. 칠칠치 못한 그런 사람은 결국은 근심거리가 되고, 고통거리가 된다고 했는데, 과연 어떻게 우리가 능력이 있을 수가 있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유능해질 수 있는가 이 말입니다. 능력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건가요? 나가 죽으라고 하는 이야기인가요?

우리의 문제는 어디에 있냐면, 잠언서 12장 4절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유능하고 싶죠. 능력이 있고 싶죠. 하지만 능력이 없다는데, 우리의 문제가 있어요. 능력 있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능력 있기를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어요? 다 능력을 갖고 싶죠. 다 유능해지고 싶죠. 문제는 내가 유능해지고 싶다고 해서, 유능해집니까? 그렇게 되나요? 아니요. 내가 유능해지려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렇게 안 되는 거예요. 태생적으로 그런 걸, 어떡하란 말입니까?

성경은 오늘 우리를 향해서 방법을 좀 가르쳐줬으면 좋겠어요. 능력 있는 방법을. 그런데 그 방법은 이야기하지 않고, 능력이 있는 여자라고 한다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모두에게 영광이 된다고만 말하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우리는 유능해질 수가 있을까요? 차라리 한국말 번역처럼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라고 한다면 좀 더 낫겠어요. 어지지 않는 사람은 노력해서 어질려고 하고, 좀 더 참으려고 하고, 좀 더 인내하려고 하고 해서, 좀 더 어질기 위한 노력을 하려면 할 수는 있겠지만, 유능해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겁니다. 공부 못하는 사람은 공부 못 하고 싶어서 공부 못하는 게 아니고, 해도 안 되는 걸 어떻겠어요? 그렇죠?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태생적으로 능력이 있고, 태생적으로 능력이 없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난 원래 그래 난 태어난 게 이 모양이야. 나는 실력이 없어. 나는 아무것도 못해. 저 사람은 능력이 있지만, 나는 실력이 없어. “나는 노력해도 안 돼.”라고 생각들을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정말 못하는 걸까요? 아무리 노력해도 정말 안 되는 것일까요?

사실은 태생적으로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체포자였습니다. 체포자. 체포자가 뭔가요? “체육 포기자.” 어떻게 아셨어요? 체육 포기자였습니다. 저는 몸이 뚱뚱했고, 달리기를 해도 18초, 19초. 100m 20초 뛰지도 못하고, 제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 하나 있었어요. 그게 무슨 과목인 줄 아십니까? 체육이 싫었어요. 제 시절에는 대학에 가려고 한다면, 학력고사 세대였는데, 체육 점수가 20점이에요. 저는 체육 점수 포기했어요. 포기. 이건 안 받는다. 체육시간에는 그냥 혼자 앉아서, 다른 아이들 축구하는 거 뛰는 거 보면서,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고, 때로는 앉아서 무시하기도 했죠. “저런 공부도 못하는 놈들” 하면서. 그래서 저는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담쌓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가서 제 아내가 운동 좀 하라고, 운동 좀 하라고 얼마나 다그치는지, 그래서 운동을 시작했어요. 시작하는데 운동을 혼자 할 수 있습니까? 끼워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끼워줍니까? 안 끼워줍니까? 안 끼워줘요. 실력이 있어야 끼워주지, 안 끼워주는 겁니다. 그런데 끼워주는 유일한 운동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족구예요. 족구는 그냥 서있기만 해도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막 대신하면 되니까, 그냥 서 있었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봤어요. 그리고 나도 그렇게 한번 해보겠다고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족구를 그래서 매주 했어요. 때로는 밤새도록 도 했어요. 그러면서 그때부터 족구를 하기 시작했는데, 놀라지 마십시오. 제가 속했던 필라델피아 목사회가 동부지역 체육대회에서 족구 우승을 했습니다. 제가 거기서 족구부 주장을 하면서, 공격수로 펄펄 날던, 왕년의 이래 봬도 이런 사람입니다. 믿어지시나요?

못한 게 아니고, 안 한 거예요. 못한 게 아니고, 포기했던 거예요. 저는 그걸 보면서, 내가 운동하고는 전혀 은사가 없고, 아무런 “내가 달란트가 없구나”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제 마음 가운데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이제는 축구를 해도 되겠구나. 그런데 아직 축구는 안 했습니다. 저는 음식을 못해요. 근데 못하는 이유는 못하기 때문에 못한 게 아니라, 안 하기 때문에 안 한 거예요. 못하는 거예요. 안타깝게도 우리는 미리 포기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 것이죠.

물론 탤런트가 있는 사람은 탤런트가 없는 사람보다는 좀 더 더 빨리 더 잘할 수 있는 거예요. 누구나 노력한다고 해서 다 손흥민이 될 수는 없는 것이고, 어느 정도 특별한 몸과 재능과 이런 것들이 다 타고나야, 그래야 손흥민과 같은 선수가 100년에 한 번 200년 만에 한 번 나올 수 있는 것이고, 누구나 다 성공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해보지 않고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은 게으르고 더 나아가서는 악한 일이지, 사실은 옳지 정당한 변명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두 종류의 사람을 보아왔습니다. “이거 하면 어떻겠느냐?”라고 이야기를 하면, 대답을 이렇게 합니다. “목사님, 저는 그것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서 그 뒤에 덧붙이는 말이, “그러니까, 저는 못합니다.” 전문가를 시키든지 “사람을 사서 쓰든지 하십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제가 한 번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번 배워보겠습니다.” 하면서 배우는 사람이 있어요.

놀랍게도 그 사람은 지금도 못해요. 근데 이 사람은 시간이 가면서 실력이 늘어요. 유능해져요. 자신의 능력들이 자꾸만 커져요. 누가 해보고 태어난 사람이 어딨어요? 처음부터 태어나면서 경험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누가 있어요? 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첫걸음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첫 발을 터 내딛는 것이고, 못하는 게 아니라 시도하지 않은 것이죠. 노력해야 유능해지는 겁니다. 내가 해보려고 마음을 먹어야 되는 겁니다.

우리들의 많은 문제가 유능하지 못한 문제에서 오는데, 그 유능하지 못한 문제가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내가 시도하지 않기 때문이죠. 노력하지 않은 것이죠. 재능이 있고, 그에 따라 사람들은 많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래서 완전히 유능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어떤 사람은 아예 포기해 버리고 전혀 유능하지 못한 채, 그저 다른 사람들의 골칫거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근심거리 고통거리가 되어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도해보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시도하면 할 수 있고, 하게 되면 더 유능해지고, 더 많이 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역시 마찬가지고 가정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왜 우리 가정은 이렇게 힘들어요? 왜 우리 가정은 행복하지 못해요? 그냥 내가 시도하지 않는 겁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했고, 내가 먼저 마음을 열어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못했고, 내가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들이 쌓여 가는 겁니다. 그냥 이 가정은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나는 잘못 결혼했어. “나는 이런 가정 정말 너무 힘들어.” 하면서 아예 포기해 버렸기 때문에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그 은혜를 우리가 믿고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내가 너희들과 함께하시겠다고 주님께서 약속해 주셨는데, 그냥 미리 포기해 버리고 전혀 시도하지 않고, 그냥 힘들게 살아갈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셔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내 힘과 능력으로는 할 수 없어요. 도와주세요. 기도하면서 시도하세요. 시도해봐야 무엇이 잘못된 줄 알고, 넘어져야 일어설 수 있는 방법 알고, 실패해봐야 성공할 수 있고, 넘어지고 넘어지고 수백 번 수천 번 넘어져봐야, 그래야 뛰고 달릴 수 있는 것인데, 걸어보지도 않고 달려보지도 않고, 나는 못 걷는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그렇게 무능하게 있을 것이 아니라 유능한 사람은 그, 그 가족들 모두에게 영광이 된다고 하는 이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기도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다가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우리는 로보트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늘 넘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에요. 하다가 실패하고 하다가 낙망하게 되고, 또 쓰러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사람이 우리들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죠. 내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이고, 쓰러질 때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서 “나를 도와주옵소서.” 기도하면서 주께서 함께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가운데 정말 우리가 원하는 그 사역들을 해나가면서, 주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해나가야지, 그렇지 않고 미리 포기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그런 어리석은 결단들을 하지 않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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