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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인내 (잠 12:16)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분노할 일들이 참 많이 생깁니다. 그렇죠? 여러 가지 분노할 일들이 많이 생기게 되는데, 이렇게 분노할 일들이 자꾸만 생기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첫 번째로, 그것은 우리 인생들이 모두 다 이기적인 모습을 가진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이기적이고 다 탐욕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그런 죄인이기 때문에, 분노할 일들이 생기는 것이죠. 내 중심적으로만 보는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생인 것이고, 결국 우리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그 사람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서기보다는, 내 이기적이고 나의 독단적인 관점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게 될 때, 결국 주변의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그리고 고통을 주게 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 가운데 분노가 일어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한다고 하면, 왜 저런 행동을 하는가? 왜 저런 말을 하는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행동과 말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불쾌하게 생각하려는 경향이 우리들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행동을 하면서도 내가 하면 로맨스요.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는 말처럼, 똑같은 일들을 우리 자신이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들은 분노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분노가 속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마음속에서부터 분노가 솟아오르는 일들이 있는데, 이렇게 분노가 솟아오르게 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라, 그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만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전혀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정상일까요? 우리 주변의 모순된 일을 보고, 불쾌한 일들을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금 나쁜 일이 벌어지고 있고, 불쾌한 일이 벌어지고 있고, 상당히 모순이 일어나고 불의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된 것을 보면서도,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치매 증상에 걸린 사람이거나, 인지 능력이 떨어져 있거나, 아니면 식물인간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야 전혀 그러한 것들을 보면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사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고, 따라서 마음속에서부터 분노의 감정 분노의 마음이 일어난다고 하는 그 자체를 가리켜서 문제라고 말하기까지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종종 어떤 종교에서는 그러한 분노의 감정마저도 없는 상태를 지향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그런 종교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목표가 무엇인가? 우리의 종교적인 목표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감정을 다 없애버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죠. 아무런 감정도 없는 사람을 지향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져도, 어떠한 일을 만나더라도, 그냥 무덤덤한 상태, 아무런 느낌을 가지지 않는 상태, 그런 상태를 지향하는 그런 종교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욕망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이 가장 고차원적인 단계라고 생각하고, 그런 욕망 자체가 없는 그 단계에 올라가는 것이야말로 열반에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러한 단계까지 올라가기 위해서 참선을 하기도 하고, 수도를 하면서, 그래서 지금은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나기도 하고, 지금은 마음속에서 욕심이 일어나기도 하고, 지금은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 나쁜 생각이 일어나기도 하고, 온갖 잡스러운 생각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전혀 외부의 영향을 아무것도 받지 않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미동도 하지 않는 꿈쩍도 하지 않는, 전혀 반응이 나오지 않는, 그런 상태로 올라가는 그것을 열반이라고 하면서, 그 목적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그런 종교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감정 자체가 없는 상태를 목표로 삼는 것은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그 어떤 사람도 그러한 목적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러한 상태를 지향하는 것은 바람직한 목표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분노하는 마음이 속에서부터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심지어 하나님을 가리켜 표현하기를,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그래요. 하나님은 진노하지 않는 하나님, 그냥 하나님은 그냥 무덤덤한 하나님, 그냥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그런 하나님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선하신 하나님을 묘사하는 한 측면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라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고요.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 가운데 하나가 진노라고 하는 성품도 있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십니까? 불의 앞에서, 악한 일 앞에서, 추한 일 앞에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악의 모습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는 것이죠. 그러한 상황 가운데 진노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오히려 더 이상할 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시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목석과 같은 상태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가 그것을 지향해야 되는 것이 아닌 것이죠. 놀랍게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들은 잘못된 것을 이상향으로 삼고, 잘못된 것을 목적으로 삼고, 정상적이지 않은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추구하라고 우리를 그렇게 현혹시키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우리 성도님들은 그러한 사실들을 잘 분별하면서 속아 넘어가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분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하는 마음들이 솟아 일어난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게 된다면, 나쁜 것을 보고, 악한 것을 보고, 옳지 않은 것을 보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의 감정이 솟아오르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 분노의 감정을 우리가 어떻게 다룰 것인가? 어떻게 표출할 것인가? 어떻게 그 분노의 감정을 전달할 것인가?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일어난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화가 들끓어 오른다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첫 번째, 우리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이 분노가 어떠한 종류의 분노인가를 분석해야 합니다. 이 분노가 정당하고 의로운 분노인가? 아니면 그렇지 못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에서부터 나타나는 그런 분노인가를 분석해야 되는 것이죠. 정말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분노의 감정, 화가 나고 있는 그 감정이 정당한 것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는 의로운 분노인가? 아니면 내가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나 중심적인 그런 상태에서 나타나고 있는 그런 분노인가를 분석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정당하고 의롭지 못한 분노일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리의 모든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한쪽 면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전체 다 안다고 한다면, 자초지종을 다 살펴보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터인데, 전체를 보지 못하고 진실의 일부분만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분노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일어난다고 한다면, 그러면 이러한 분노의 감정이 옳은 정의로운 분노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지금 인지하고 있는 것이 바른 인식인지, 일부만을 알고 있는 것인지, 내가 지금 자초지종을 전부 다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진리의 한 면만을 보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되는 것이죠.

지금 나는 이쪽 면을 보고 화가 났지만, 내가 보지 못한 다른 면이 혹시 뭐가 없는지,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다른 측면이 없지는 않은지, 한 번 더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더 많이 알면 알수록, 분노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측은한 마음이 들 수 있는 것이죠. 누군가 도둑질하는 사람을 본다면, 그 도둑질하는 그 모습만 보았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일어나게 될 겁니다. “저 나쁜 놈” 하면서 분노가 일어나게 될 겁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도둑이 자기 어머니를 도와주기 위해서, 먹을 것이 없는 자기 가족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만 했었다고 하는 그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냥 분노해 버리고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죠. 좀 더 사실을 더 많이 알고, 저 사람이 어떠한 형편에 있는지,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 진리의 다른 측면까지 더 알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자칫 분노했던 마음 가운데서, 오히려 긍휼의 마음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다 보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일어나는데요. 특별히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기르면서, 자녀들이 이상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하게 됩니다. 우리 남편이 정말 정 떨어지게 행동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분노하게 되는 겁니다. 내 아내의 모습이 정말 이상한 것 같아서, 분노하게 되는 것이고, 직장에서 같이 일하는 같은 동료를 바라보면서, 상사나 부하 직원을 보면서 분노하게 되는 것인데요. 그렇게 분노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우리는 그 진리의 일부분만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와 같이 일하던, 이 직장에서 같이 일하는 이 동료가 어젯밤 가족 가운데 엄청나고 큰 위험한 일을 당해서, 그것을 처리하지 못해서 엄청난 고난과 스트레스 가운데 있다가, 밤 한숨도 자지 못하고,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다가, 직장에 겨우 나와서 일을 한다는 것이, 손에 잡히지 않고, 그래서 실수하고, 그래서 일을 그르치는 그 모습까지 다 알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일어났던 것이 누그러지고, 그를 향한 측은한 마음이 생길 수가 있는 것이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일어나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정당한 분노인지, 의로운 분노인지를 분석해야 될 것이고, 만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과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진리의 일부분만을 보고 있는 것인지, 우리가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초지종을 듣지 아니하고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한다면,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렇게 분노를 표출한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잠언서 18장 13절 말씀에 보면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한 채, 자초지종에 대해서 설명도 듣지 않은 채, 그 사람의 형편이 무엇인지 살펴보지도 않은 채, 그냥 내 기분 느끼는 대로, 내 감정에 따라서, 분노해 버리고, 화를 내버리고, 함부로 말을 해버리는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말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일어난다면, 그리고 나로 하여금 분하게 만드는, 화나게 만드는 그 면만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내가 보지 못한 어떤 부분이 있는지, 우리 아이가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고, 우리 남편이 이상하면, 우리 남편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귀를 기울여 봐야 할 것이고, 직장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가 상사가 부하가 이상하게 행동한다면, 왜 저렇게 행동하고 있는지, 내가 알지 못한 면이 무엇이 있는지, 좀 더 알아보려고 하는, 이해하려고 하고 사연을 들어보려고 하는 노력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사연을 듣지 않고, 무조건 분노하고, 무조건 욕하고, 무조건 돌을 던지는 시대입니다. 누군가를 증오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유튜브 영상만을 보고, 분노하고 있고, 사실을 제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해서, 그래서 어느 한 편을 모욕하고, 분노하게 만드는 그런 신문 기사를 보고 분노하고 있으며, 말 한마디에 분노하고, 사진 하나에 분노하고, 우리는 자초지종을 알아보지 않고, 무조건 분노하는 일에 너무나도 빠른 모습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무엇을 말하냐면, 어리석은 자는, “분노를 나타내는 자가 어리석은 자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노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입니다. 분노하면, 그 분노로서 상대방을 제압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 상대방의 말을 가로막을 수도 있고, 제압할 수도 있겠지만, 그 분노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독이 될 뿐만 아니라, 사실은 가장 큰 피해는 나 자신이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생생한 예가 바로 사울 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 자기 아들 요나단에 대해서 분노했고, 제사장 아히멜렉에 대해서 분노했으며, 자기 신하들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배신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다 나의 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러한 사울의 그 분노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여긴 그 사울 왕은 결국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분노는 특별히 나 자신과 관련된 분노는 대체로 정의롭지 못하고 옳지 못한 분노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분노가 내가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내가 교만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분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생겨나게 된다고 한다면, 그 분노를 쉽게 발산할 것이 아니라, 그 분노를 억제해야 할 것입니다. 분노가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것 자체는 그 자체로서는 죄가 아닐 수 있겠지만,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솟아 나오는 그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죄가 될 수도 있고, 죄가 안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 마음속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그 분노를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하면, 그게 죄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 내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그 분노를 잘 제어하고 잘 컨트롤해서, 죄 된 방식으로 표출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그게 죄가 되지 않는 것이죠.

에베소서 4장 26 27절의 말씀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에베소서 4장 26절 말씀의 기록이 무엇이냐 하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 죄짓기 직전의 분노가 있는 거예요. 분을 내는 것까지는 아직 괜찮아요. 그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고, 살아있다고 한다면, 누구든지 생길 수 있는 감정이에요. 그 분노의 감정이 솟아올랐는데, 그것을 가지고 죄를 짓는 데까지 나아가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죄를 짓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일어나게 될 때 그 분노를 발산시켜서 죄악을 저지르게 되는 것은 우리들이 마음의 틈을 마귀에게 열어주는 것이고, 우리들의 마음의 운전대를 사탄에게 맡기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의 열쇠를 사탄에게 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콜라 사이다의 뚜껑을 따게 되면, 그러면 그 안에서 솟아오르게 되고, 그리고 그 열린 뚜껑 안으로, 그 구멍으로 모든 공기가 들어가고, 다른 이물질이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처럼, 한 번 우리가 발산해 버리면, 분노를 쏟아내 버리게 된다면, 마귀가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오게 되는 통로가 된다고 하는 점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일어났을 때,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 것인가? 대부분의 경우는 우리가 진리를 제대로 잘 보지 못한 것이기에, 자초지종을 알아보면서, 우리가 그 분노를 함부로 발산하지 않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분노가 정의롭고 정당한 분노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 분노를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아주 극소수의 케이스만이 분노가 정당한 분노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요. 의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요. 이러한 의분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럴 때 우리들의 분노의 감정에 우리들의 행동이 끌려다녀서는 안 되는 것이죠. 우리들의 분노의 감정에 우리들의 행동이 끌려 다니게 된다면, 결국 우리는 악마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언제 악마가 되는가? 내가 옳을 때 악마가 되는 것이죠. 우리는 나쁠 때 악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옳고 정당할 때, 폭력적이 되는 겁니다. 내가 옳고 정당할 때에, 악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종종 뉴스를 듣다 보면 아주 황당한 뉴스를 듣게 되는데요. 아버지가 자식을 훈육한다고 매질을 해서, 그래서 죽였다고 하는 그런 뉴스를 종종 듣습니다.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을까요?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의 잘못을 보고, 훈육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분명히 아들이 잘못했어요. 분명히 자기 딸이 잘못했어요. 그래서 그것을 바로잡고, 그 아이를 정말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 분노 가운데 자녀들에게 함부로 훈육하다가, 결국 죽이는 데까지 가는 거예요. 우리는 왜 자녀를 죽이는가? 내가 옳기 때문에, 내가 정당하기 때문에 죽이는 거예요. 내가 나쁘면 죽이지 않아요. 그런데 내가 옳고 정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독재자가 되는 것이고, 포악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악마가 되는 것이죠. 우리는 정당할 때,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은 다 무슨 짓을 해도 정당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분노가 정당하다 할지라도, 그 분노를 정당한 방법으로 표출하지 않으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분노를 그냥 표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죄악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서 슬기로운 자는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수욕을 참는다. 분노가 있으면, 그 분노를 발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분노할 만한 상황이 있을 때, 화를 표출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화를 표출하지 않고, 지혜로운 자, 슬기로운 자는 그 분노를 제어하면서, 그래서 함부로 그 분노가 밖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만드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런 면에서 늘 실수합니다. 우리는 늘 넘어집니다. 우리 자녀에게 쉽게 분노하고, 우리가 가장 사랑해야 될 대상을 향해서 가장 화를 많이 내버리고, 분풀이를 해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성으로 가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 가득하다고 한다면, 그때 쉽게 분을 표출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나의 허물과 죄악을 고백하고, 분노를 표출하는 그러한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용서해 주실 것을 빌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진노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진노하시려고 한다면, 진노하실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을 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은 인생을 살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진노를 쏟아내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 진노를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내려주시고,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은혜를 베푸시고, 은총을 내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보혈로 저희를 구원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우리의 영적인 성숙을 위해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은 바로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날마다 날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저희들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쉽게 분노하고 쉽게 화를 표출해 버리고 그래서 내 가장 사랑해야 될 사람들을 향해서 마음을 아프게 했던 그 모든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참 나쁜 사람이었어요. 우리 가족들을 향해서 화를 내고, 불평하고, 우리 가족들을 힘들게 하던 그런 나쁜 남편이요. 나쁜 아빠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분노하고, 조금만 어려움이 있어도 화를 내고, 그 화를 화풀이해버리는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서 진노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을 본 거예요. 나와 같은 죄인을 향해서, 진노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에게 베풀어 주셨구나. 나와 같은 죄인도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고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가 가지게 됐습니다.

여전히 제 마음 가운데는 분노가 일어나게 되고, 그리고 그 분노를 죄악으로 잘못 발산한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되는 것이고,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이 연약한 자를 붙잡아주셔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바꾸어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정말 어리석은 자처럼 함부로 화를 내고 발산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향해서 은혜 베풀어주신 그 모습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며 살아가는” 그런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문득문득 분노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에 솟아 옳을 때, 그때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어리석은 자는 그 분노를 당장 드러내지만, 슬기로운 자는 그것을 참고 견디고 인내한다고 하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날마다 날마다 더 가까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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