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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천국을 사는 법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무서워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이사야 선지자였다. 그는 하나님을 뵙고 나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쳤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 천둥과 번개와 우레 소리와 함께 하나님께서 강림하셨다. 하나님의 강림하심이 너무나도 장엄하고 무서웠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외쳤다.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지 마시고, 모세와만 말씀할 것을 간청하였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다른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의 백성들과는 달리 시내산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성, 하늘의 예루살렘에 서게 되었다고 했다. 즉 예수님의 피로 세운 교회에 이른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점은 구약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구약의 백성들은 두렵고 떨림 속에서 시내산에 이르렀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 이르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할 형벌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지 말고 순종하는 삶을 살라고 권고하고 있다. 비록 지금은 그 옛날 시내산에서 나타나셨던 하나님처럼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없는 것 같이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을 살 게 아니라, 순종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러한 말씀을 전하면서 히브리서가 사용한 표현은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도성, 하늘의 예루살렘에 미래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미래형을 써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이르렀다고 완료형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단 말인가? 우리의 현실을 그렇지 않은데, 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천국의 성경적 개념이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개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 하면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천국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장소적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죽은 이후에 하나님과 완전히 함께할 것이기 때문에,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표현해도 맞다. 하지만 지금은 지옥의 삶일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천국의 삶이 시작된다. 순종을 많이 하면 할수록 그 천국의 부분이 커질 것이고, 순종의 영역이 작으면 작을수록 천국의 영역은 작아질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서 천국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 그것도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는 것에 달려있지 않다. 오히려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데 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그랬다. 요셉은 노예가 되었을 때도, 감옥에 갇혔을 때도, 지옥에 빠진 것처럼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았다. 그래서 그곳은 바로 천국이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지만, 감옥에서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찬송을 불렀다. 그곳에서도 주님이 함께하심을 느꼈기에 천국이었기 때문이었다. 찬송은 언제나 천국임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연관 설교: http://www.jjvision.org/?p=17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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