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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 (잠 12:22-23)

오늘 2절 말씀을 읽었는데요. 이 두 절의 말씀의 주제는 다릅니다. 22절의 말씀에서는 거짓과 진실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고, 23절에는 지식과 슬기로움과 미련함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22절에서 들려주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가? 우리가 정직한 것, 우리가 진실한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만일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속임수를 쓰고, 또한 여러 가지 헛된 것을 말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 혐오하신다라고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아주 당연한 말씀이죠. 10 계명 가운데서도 제9계명이 “거짓 증거 하지 말라”라고 되어 있는 것인데, 거짓말을 하는 것, 진실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혐오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의 삶과 우리의 말과 행동이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속이는 것일까요? 그것은 물질을 우상으로 삼게 될 때, 명예를 우상으로 삼게 될 때, 우리들은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고, 속이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면 진실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특히 물질이 우리의 우상이 되거나, 명예가 우리의 우상이 된다고 한다면, 그러한 것들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짓말하는 것은 일종의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우상으로 섬기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요.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우상숭배를 싫어하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짓말하는 것을 싫어하시는가? 왜 혐오하시는가?

그것은 그 거짓말이 결국은 우리를 망가뜨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짓말이 우리를 파멸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생각에 거짓말을 하면 위기를 모면할 것 같고, 거짓말을 하면 그 순간을 넘어갈 수 있을 것 같고, 내가 했던 잘못들을 감출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피할 길이라고 생각하고, 거짓말을 하게 되지만, 하지만 이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망하는 것을 보지 않으시기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망하지 않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거짓말하는 것을 싫어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잠언서를 살펴보는 가운데 진실과 거짓에 관한 교훈의 말씀들이 여러 번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많이 살펴보았죠. 지난번에 12장 17절을 살펴보면서 “거짓 증인”이라는 제목으로 우리가 말씀을 나누었고, 12장 5절과 5절에서부터 7절까지 살펴보면서 “정직과 속임”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11장 3절을 살펴보면서 “정직이 인도하는 길은 안전합니다”라고 하는 주제로 살펴보았고, 11장 1절을 살펴보면서 “공평한 주는 모두가 기뻐합니다”라고 하는 제목으로 살펴보았고, 6장 12절에서 19절까지 “거짓된 혀”라고 하는 제목으로 함께 살펴보았는데, 잠언에서 정말 많이 교훈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이 거짓과 진실에 관한 교훈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늘 다시 거짓의 문제를 진실과 거짓의 문제를 다시 한번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했던 그 설교들을 다시 한번 들으면서, 유튜브를 통해서 다시 한번 들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고, 우리가 아직도 이 문제가 우리들을 넘어뜨리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정직하지 못하고, 거짓말의 문제가 우리를 여전히 다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주님 앞에 엎드려서 진실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진실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진실한 혀를 가질 수 있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 앞에 솔직해지고, 사람들 앞에 솔직해질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정말 힘들고 참 고통스러울 때에도 우리가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 사실은 그게 창피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23절의 말씀에 대해서 더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23절의 말씀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어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어떻게 한다고요? 감춘다! 자기 지식을 드러내고, 자기 지식을 말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자기 지식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어 두는 자가 슬기로운 자이고, 어리석은 자는 누군가? 미련한 자는 누군가? 자신의 미련한 것을 자꾸 전파하고, 미련한 것을 자꾸 말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오늘 23절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23절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춘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 어떤 정보가 있고, 어떤 지혜가 있어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 게, 슬기로운 일이다”라고 하는 말인가요? 우리에게 지식이 있고, 정보가 있고, 우리에게 어떤 좋은 지혜가 있는데,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지혜는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식도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지식이 전달이 되고, 지혜가 전달이 되었기 때문에 인류는 지금까지 어마어마한 발전을 해왔던 것이죠. 인류와 사람들과 동물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식의 전달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동물들은 지식을 쌓아도,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 지식이 후대에 전달이 안 됩니다. 자신이 깨달은 것이 후대에 전달이 안 되는 거죠. 하지만 사람은 어떤 점에서 다른가? 지금까지 배웠던 지식, 지혜, 모든 정보들을 책으로 남길 수 있고, 또한 가르칠 수 있고, 그래서 그 가르침을 통해서 후대를 교육하고, 그래서 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처음부터 연구할 필요가 없어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 위에서, 그다음 업적을 쌓아가는 겁니다. 이미 발견된 원리와 법칙들 위에서, 또 다른 발견을 해내는 것이고, 그 위에서 또 다른 발견을 하기 때문에, 엄청난 지식의 발전이 있는 것이고, 오늘날에는 정말 대단하게 발전된 사회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지혜와 지식 정보가 있다고 한다면, 말하지 않는 게 좋은 게 아니라, 사실은 말을 해야 되잖아요? 전달해 주어야 되잖아요? 그리고 우리는 그 앞선 사람들의 지혜를 배워야 하잖아요? 그런데 왜 오늘 잠언서 이 12장 23절의 말씀에서는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춘다고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더 놀라운 것은 사실, 이 잠언서를 쓰고 있는 이 잠언서의 기자는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지식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어요. 솔로몬이 이 잠언을 썼다고 한다면, 이 잠언을 써서 우리들에게 지혜를 알려주고 있고, 우리에게 지식을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지식을 알려주는 그 일을 하면서 하는 말이 무슨 얘기를 하냐면,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두 번째 항목을 먼저 살펴보면 좋을 것 같은데요. 미련한 자는 어떻게 하는가? 지혜로운 자와는 달리 미련한 것을 전파한다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나, 미련한 자는 미련함을 전파한다? 도대체 이 말이 무슨 의미일까 우리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고 한다면, 전파하는 것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점을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무엇인가를 전파하는 것, 무엇인가를 선포하는 것이 잘못입니까? 좋은 일입니까? 무엇인가를 전달해 주고, 무엇인가를 선포해 주고,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그 행위가 좋은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예? 좋은 일이에요? 나쁜 일이에요?

그것은 무엇을 전달하느냐에 달려있어요. 만일 그 전파하는 내용이 정말 좋은 내용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전파해야죠. 당연히 그 좋은 내용을 전파하는 것이 좋은 일이죠. 하지만 내가 전파하는, 그 전파하는 그 내용이 가짜 뉴스라고 한다면, 나쁜 일이 되는 겁니다. 만일 우리가 전파하는 그 전파의 내용이 거짓 정보라고 한다면, 악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좋다 나쁘다를 판단할 때, 우리는 무엇으로 판단해야 됩니까? 전파하는 그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것이지, 전파 그 자체(per se)가, 가르침 자체(per se)가 잘못되었다. 혹은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죠.

영국의 비평가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했던 아주 유명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혹시 그게 뭔지 아십니까? 토마스 칼라일이라고 하는 사람이 했던 아주 유명한 말, 그것이 무엇이냐면, Speech is silver. Silence is gold.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고 하는 말을 해서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그 말이 아주 유명한 말이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칼라일이 그런 좋은 웅변을 했어요. “웅변은 금이고, 침묵은 금이다”라고 하는 그런 웅변을 칼라일이 한 거예요. 만일 칼라일이 침묵만 했다고 한다면, 그런 좋은 말을 우리가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좀 냉정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는데요. 무엇이 중요하는가? 무엇이 중요한가? 그것은 전파하느냐, 전파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말을 하느냐 침묵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웅변을 하는가 침묵하고 있는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담고 있느냐가 정말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미련한 자는 무엇을 담겠습니까? 미련한 자는 어리석은 말을 하는 것이죠. 미련한 자는 미련한 말을 하고, 가짜 뉴스를 전달하고,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고, 지혜로운 자는 무슨 말을 합니까? 지혜로운 자는 지혜로운 말을 말하는 것이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참된 말을 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 잠언서 12장 23절의 말씀에서는 왜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춘다고 말을 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왜 어리석은 자는 “미련한 자는 그 미련을 전파한다”라고 되어 있을까요? 그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하는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말씀은 그러니까 침묵을 해야 된다. 말하지 말고 입 다물고 있어라. “입 다물어야 옳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그런 내용의 말씀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냐면, 슬기로운 자는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왜? 슬기로운 자는 내가 말할 때, 이것이 진실인지, 혹은 내가 잘못 알고 있는 부족한 정보인지, 혹시 잘못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지, 그것을 조심하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겁니다. 단언해서 말하지 않는 겁니다. 왜 내가 틀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지혜로운 사람은 함부로 단언해서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죠.

누가 지혜 있는 사람인가? 지혜 있는 사람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지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파악한 이 내용이 충분히 파악해 보지 않은 상황 가운데서, “이게 맞다”라고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 것이죠. 몇 가지 정보만을 듣고서, 쉽게 판단을 내버리면, 그게 맞는 것 같지만, 그게 잘못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혜로운 자는 어떡하는가? 내가 몇 가지 정보를 듣고 내릴 수 있는 그 결론이 마음속에 떠올라도, 함부로 결단 내리고, 함부로 결론을 내려버리고 말하지 않는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누군가? 어리석은 사람은 누군가?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잘못되었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거예요. 한 가지 정보만을 듣고, 이쪽 편만을 바라보고, 너무나도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다음에, 이것이 진짜인 줄 알고, 막 이야기해버리는 겁니다. 막 말해버리는 겁니다. 그것을 말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분노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기뻐하기도 하고, 정말 온전한 결론이 아닌데, 몇 가지 정보만을 본 부족한 결론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어리석은 사람이오. 미련한 사람이라 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전하는 말이 진리가 아니라, 사실은 어리석은 판단이오. 옳지 않은 판단을 함부로 말해버린 경우가 되는 것입니다. 원통을 바라보게 될 때, 원통의 위에서 보면 동그라미처럼 보이지만, 원통의 옆에서 보면 네모난 것처럼 보이는 것인데, 그 원통의 한쪽 면만을 보고, “이것은 동그라미다”라고 쉽게 결론을 내어버리고, 이건 동그라미라고 지식을 전파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인 거예요.

그런데 지식이 있는 사람, 지혜 있는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네모라고 봤어요. 분명히 네모로 보여요 하지만 네모라고 말하지 않아요. 왜? 나는 전부를 본 것이 아니라, 한쪽 측면만을 본 것이고, 내가 보지 못한 다른 측면이 있기에, 내 지식이 전부가 아니라, 이것이 잘못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네모라고 주장하지 않는 거예요. 혹시 더 잘못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함부로 말하기보다는, 한 번 더 기다려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고, 그래서 “이것이 네모가 아니라 원통일 수 있겠구나”라고 하는, 그 진리에 더 가까이 가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지혜 있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이 말이에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함부로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다른 관점도 들어보고 하면서, 그래서 그 지식이 온전해질 때까지 더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려서, 진리에 더 가까이 가려고 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지, 쉽게 결론을 내어버리고, 부르르 떨면서 분노해 버리거나, 쉽게 결론을 내버리고 절망해 버리거나, 쉽게 결론을 내버리고 기뻐 좋아하는, 그런 일희일비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어리석은 사람은 결론이 너무나도 빨리 내려졌기 때문에, 너무나도 큰 확신 가운데 있습니다. 진리의 모든 것을 본 것이 아니라, 일부만을 보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확신에 차요. 그 확신에 찼기 때문에 목소리가 커요. “이게 진리다”라고 이야기해요. 이게 정답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서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다른 면을 보고 있으면서, 그 사람이 목소리 높일 때, 그냥 속에서 비웃는 겁니다. 저 사람은 다 보지 못한 채 저렇게 분노하고 있구나. 저 사람은 다 보지 못한 채 저러고 있구나. 하면서 속에서 비웃고, 아예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맞는 줄 알고 더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 슬기로운 사람은 어떡하는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내가 내린 결론을 가지고,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말하지 않는 겁니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혹시 내가 일부분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원통의 네모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번 더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 봐야 하기 때문에,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자신의 지식을 섣불리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하지 않는 자가 지식이 있는 자요. 슬기로운 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런 어리석음에 쉽게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누구냐면, 안타깝게도 크리스천들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강한 믿음의 체계 위에서 우리의 믿음이 세워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도 성급하게 믿어버리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많이 있어요. 그리고 누군가 이야기해버리면 그게 전부인 줄 알고, 그게 전부인 줄 알고, 거기에 따라 분노하기도 하고, 거기에 따라 우리가 열정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걸음 물러서서, 이게 진짜인지, 가짜 뉴스인지, 과장된 정보인지, 혹은 잘못된 정보인지, 다른 쪽에서의 보는 것은 어떤 관점이 있는지 진지하게 따져보아야 하고, 진지하게 헤아려 보아서, 우리는 진리에 점점점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하는 것이고, 우리가 진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소경이 되어서 소경을 인도하다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그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리석게 되면 그러면 결국 우리들을 악용하는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은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용을 당하기가 쉽습니다. 그런 일들이 지금까지 역사상 너무나도 많이 존재해 왔습니다. 예를 들자면 군중들은 확신에 차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군중들을 향해서 제사장들이 인포메이션을 전달하는 겁니다.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겁니다. 예수는 누군가? 예수는 하나님을 모독한 사람이오. 예수는 성전을 무너뜨리겠다고 한 사람이오. 이 예수는 우리 모세의 율법을 폐하는 사람이오. 이 예수는 우리 유대교의 적이라고 하는 제사장들이 만들어낸, 바리새인들이 만들어낸, 가짜 뉴스를 이 이스라엘 군중들 가운데 주입하게 되었을 때, 그 사람들은 그 잘못된 정보만을 듣고 확신에 차서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 그래서 결국 그 확신에 찼던, 어리석고 너무나도 쉽게 결론을 내렸던 그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죠.

뿐만 아니라 바울과 같은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교회들을 핍박하러 다녔는데요. 자신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가짜 정보들, 불충분한 정보들을 가지고, 쉽게 결론을 내리고 거기에 열정을 세워가면서, 그래서 교회를 핍박하며 다니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하는 그 가능성은 아예 생각지도 않은 채, 그리고 그래서 교회를 핍박했다가, 결국 나중에 자신이 틀렸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특별히 우리가 힘이 있고 우리가 다수일 때 이런 위험 가운데에 빠질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역사상 우리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가장 큰 실수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십자군 전쟁입니다. 그 당시 종교 권력자들은 탐욕스러운 그런 장사꾼들과 결탁을 해서 무지한 성도들을 현혹시켰던 것이죠. 저 예루살렘을 탈환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선한 일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 십자군 전쟁에 모두가 동원이 되고 목숨을 잃어버리는 그런 어마어마한 일들을 하게 되었는데, 미련한 일에 모두가 다 동원이 되고, 미련한 일에 참여하게 되는 그러한 일들을 보였던 것이 그 당시의 문제였고, 이러한 잘못된 관행들이, 이러한 잘못된 일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될 수 있다고 하는 점을 저와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질문을 던져야 됩니까? 과연 이게 옳은가 질문을 던져야죠. 내가 들은 그 말, 내가 가진 그 정보가 진짠가? 가짜인가? 한번 따져봐야죠. 따져보지도 않고, 들었던 몇 마디 말에 의해서 분노하고, 화를 내면서, 그러면서 그 말을 전파하는 것은 오늘 잠언서 12장 23절의 말씀에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 “미련한 사람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정보를 들었을 때, 우리는 항상 질문을 던져봐야 돼요. 특별히 언제 질문을 던져야 되는가? 우리가 보았을 때 황당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면 분노할 게 아니고, 이런 일이 왜 일어나고 있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다른 면이 있지 않을까? 질문을 던져봐야 돼요. 우리 가운데 무슨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 조그마한 정보만을 가지고, 황당한 일이라고 규정해 버리고, 분노해 버리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저런 황당한 일처럼 보이는 일들을 하는, 그 다른 측면이 무엇이 있을까? 알아봐야죠. 알아보고, 그리고 그 자초지종을 살펴본 다음에, 내가 섣불리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누가 만들어냈던 그런 예화일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실화가 아니라, 누군가 만들어낸 예화겠죠.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아들을 수술을 해야 되는데, 수술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 수술을 해서 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긴박한 상황 가운데서 있는데, 의사가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의사가 나타나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는 너무나도 조급하고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에, “왜 의사가 안 나타날까? 우리 아이를 살려내야 되는데.” 그런데 그 의사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가지고, 그래서 수술실로 막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아빠가, “여보시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하면서, 막 신경질을 내려고 하는데, 그냥 쏙 들어가 버려서 수술을 막 하고,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아버지는 수술실 밖에서 기다립니다. 우리 아이의 수술이 잘 됐을까? 어땠을까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 의사가 수술을 마치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 의사에게 묻습니다. “혹시 어떻게 수술이 잘 됐나요? 어떻게 됐나요?” 하고 물어보는데, “잘 됐습니다” 하고 막 가버리는 거예요. 설명도 안 하고, 그러니까 이 아빠가 너무나도 화가 났어요. 도대체 의사라고 하는 사람이 이게 무슨 짓인가? 하면서 화를 내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뒤를 따라온 간호사가 이야기를 해주는 겁니다. 저분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서 장례식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장례식 도중에 온 겁니다. 그리고 다시 그 장례식을 향해서 간 겁니다.

우리가 볼 때는 분노할 만한 일이고, 우리가 볼 때는 화날 만한 일인데, 그런 일을 왜 하고 있을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알고 보면, 내가 보지 못한 다른 측면이 있는 것이죠. 미련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만 보고, 자기가 알고 있는 그 면만 보고, 화를 내고 분노하며, 또한 자신만이 알고 있는 그 얄팍한 지식을 막 전파하는 겁니다. 가짜 뉴스를 막 전파하는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하면, 그 말만 듣고 전파하는 겁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무조건 가짜 뉴스를 계속 퍼뜨리는 겁니다. 분노하면서 터뜨리는 거예요.

하지만 슬기로운 자는 누군가? 지식을 감춘다. 지식을 감춘다. 그 얘기는 가르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전파하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그 정보가 이게 진짜일까? 혹시 부분적인 지식은 아닐까?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은 없을까? 한 번 더 또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며, 진리를 다 알기 전까지는, 참고 기다리며 인내할 줄 아는 자가 슬기로운 자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하시는 우리 성도님들은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전파함으로써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수군수군 대며 나쁜 말을 하는 그런 일들을 그냥 “그럴 수 있다.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다.”라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심각한 죄의 목록 가운데 포함시켜 놓았습니다. 간음하고 살인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하는 그런 죄와 똑같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조그마한 정보를 가지고, 부족한 정보를 가지고, 비난하고 수군수군거리며, 그래서 한 사람을 무너뜨리고,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이 사람에게 전화 걸어서 이야기하고, 저 사람에게 전화 걸어서 이야기하고, 얼마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만 이야기해서, 그래서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엄청난 죄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완벽하지 못한 지식, 그것으로 분노하거나 말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지식을, 더 나은 진리를 얻기 위하여 기다리고, 참고 더 알아가는 것입니다.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 모두가 다 이런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되기를 소망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침묵하는 것이 무조건 금은 아닙니다. 말해야 될 것은 말해야 합니다. 진리는 말해야 하는 것이고, 거짓은 침묵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거짓인지 진리인지 확실하지 않을 때, 우리의 섣부른 지식을 가지고 함부로 말해버렸다가는 미련한 자가 미련을 말하고 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숨길 수 있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쉽게 말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숨길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너무나도 죄성이 강해서, 우리는 조그마한 것을 더 부풀려 말하기를 좋아하고, 우리가 받은 것이 이만큼이면 그것을 뻥튀기해서 전달하려고 하는 그런 나쁜 습성이 우리들에게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날마다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기도하기를, “주님 오늘도 저희들의 혀에 파수꾼을 세워 주옵소서” 기도해야 할 것이고, 밤에 잠을 잘 때 하나님, 오늘 내가 입술을 통해서 미련한 것들을 전한 것은 없는지 회개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것이고, 바로 그러한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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