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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같은 하나님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비유한다. 시편23편에서는 목자로 비유하기도 하고, 누가복음 18장에서는 재판관으로 비유하기도 하고,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주인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성경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비유들을 찾아보면 부지기수로 많다. 이렇게 하나님을 이 세상의 것들에 비유하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잘 나타내는 비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아버지라는 비유이다. 로마서 8:14-15에서는 우리가 종의 영을 받은 게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으며,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달란트 비유 또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묘사한다. 그렇게 묘사하는 이유는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며,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심파하시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주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드러내주지는 못한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제대로 드러내주는 비유는 탕자의 비유이다. 마치 탕자의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받아주시며 회복시켜주시는 분이시다.

종으로서 일하는 것과 자녀로서 일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종은 무서워서 일하고, 일해야 하기 때문에 일하고, 일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녀는 사랑하기 때문에 일한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아버지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태도는 달라질 것이다.

심청전을 보면, 세 종류의 사람, 심봉사, 뱃사람, 심청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큰 희생을 치러야 했던 사람들이다. 심봉사는 공양미 3천석을 바쳐야만 했다. 벳사람은 처녀를 인당수에 바치기 위해 3천석을 지불해야 했다. 심청은 자기 목숨을 바다에 던져야 했다. 하지만 앞의 심봉사는 바쳐야만 눈을 뜰 수 있다고 하니까 바친 것이고, 뱃사람은 바쳐야만 무사히 항해를 할 수 있다고 하니까 바친 것이다. 하지만 심청은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자신을 내어줄 수 있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비슷하다. 어떤 사람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지 못하고 저주를 받을까봐 무서워서 신앙생활을 한다. 하지만 참된 신앙생활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녀를 위하여 아낌없이 준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얼마나 잘 했는가에 따라 상을 주거나 벌을 내리시고 마는 차가운 재판관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조건적으로 한없이 사랑해주시는 사랑이다. 그러기에 그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그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연관설교: http://www.jjvision.org/?p=18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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