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가장 큰 계명 – 십계명 강해 1

오늘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총, 오늘까지 포함해서 총 12번에 걸쳐서 복음의 눈으로 본 십계명 강의 시리즈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매주 연달아서 하지는 않겠지만, 중간중간에 다른 프로그램들이 있기 때문에 빠지고, 이렇게 뛰어가면서 하겠지만, 앞으로 12번에 걸쳐서, 우리가 살펴볼 주제는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우리가 바라볼 때,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아야 되는가? 특별히 성경 모든 것들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그리고 십자가 위해서 피 흘려 죽으시고,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의 사건 아래서, 성경 말씀을 읽는 것이 성경을 바르게 읽는 방법이라고 우리가 기억할 수가 있겠습니다. 십계명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십계명을 우리가 바라볼 때도, 그냥 십계명을 그냥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보혈의 관점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해서 피를 흘려주셨던 그 은혜의 관점 가운데서, 이 십계명의 말씀도 읽고 해석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우리가 이 십계명의 구절들 하나하나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를 원하는데, 오늘은 서론 격으로, 오늘과 그리고 다음번에 한두 시간에 걸쳐서는, 십계명의 서론 격으로 우리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십계명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트 신앙 고백서는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신 순종의 법칙이 도덕법인데, 이 도덕법은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요약해 놓은, 가장 중요한 도덕적인 법칙이 무엇인가? 바로 십계명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런 도덕적인 법칙을 요약해 놓은 것이라고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십계명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잘 숙지할 필요가 있겠고, 하나님께서 이 십계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가에 대해서, 우리가 잘 아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십계명을 더 요약한 말씀이 있습니다. 더 요약하고 더 요약해서, 아주 간단하게, 정말 명약관화하게, 아주 작지만 아주 중요하게, 이 성경 말씀 십계명의 말씀을 요약해 놓은 말씀이 무엇이냐면, 오늘 읽은 마태복음 22장의 말씀입니다. 오늘 읽었던 말씀, 한번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부터 40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건데요. 구약 성경 전체의 말씀이 어디에 매달려 있는가? 마치 우리가 옷걸이에 옷을 걸어놓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 걸려 있는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이 두 계명에, 하나님의 그 계명의 말씀들이 다 걸려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10개의 계명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고 하면,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도덕법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법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 사회에서의 법, 이 성경의 법 말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법들이 있죠? 운전을 하려고 하면 교통 법규가 있습니다. 건축을 하려고 하면 건축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매매를 하고 또 무슨 장사를 하고 하면 상법이 있습니다. 또 우리가 살아가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하나의 형법이 있고, 또 민법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유학봉 집사님이 아마 잘 아실 거고, 또 우리 한상근 집사님이 아주 잘 아실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이 사회에서의 법이란 무엇인가? 이 사회에서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여러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법입니다.

내 자유를 누리는데, 내가 자유를 누리다 보면, 이 사람이 누리는 자유와 저 사람이 누리는 자유가 서로 상충이 돼서,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를 줄 수가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제약해야 될 그런 필요가 생기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으면서, 나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얻기 위해서,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범을 가리켜서 그것을 법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동차 운전을 한다고 하면 자동차 운전을 할 때 교통법규가 있습니다. 교통법규가 있어서 빨간불에는 서야 하고, 초록불에는 갈 수 있고, 그리고 속도의 제한이 있고, 어디에서는 유턴을 할 수가 있고, 좌회전을 할 수가 있고 없는 것들이 다 있어서, 이러한 것들을 지킬 때 교통사고가 나지 않고 안전하게 운전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 이러한 교통법규를 어기게 되고, 그래서 그 법규를 무시하고 운전을 하게 되면, 교통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누군가의 책임 때문에 잘못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고, 사고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법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피해를 서로 주고받지 않기 위해서, 지켜야 될 최소한의 법이 바로 이 사회에서 우리가 지켜야만 하는 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에 교회당을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건축법이 정말 까다롭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됐는데요. 평상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우리 예배당을 개축하면서, 이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필요한 법칙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고, 그래서 일조권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다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땅 경계로부터 어느 정도 안쪽으로 들어와서 지어야만 하는 것이고, 등등 여러 가지 그 법칙들을 잘 지켜야만, 그래야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또한 나의 이익을 최대한도로 유지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성경에서 기록되어 있는 이 십계명은 무엇이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이 법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도록 만드시는 삶의 방식, 삶의 법칙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특별히 이 법은 최소한의 규범이 아니라 오히려 최대한의 생활 방식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안 주기 위해서 억지로 지켜야 되는 법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것이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기쁘게 할 것이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는 그 원래의 목적을 이루면서 살아가게 할 것인가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이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은, 이 세상의 법과는 달리, 이 세상의 법은 소극적이고 제한적이고 최소한의 규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최소한으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적극적이고 그리고 최대한 대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신가를 발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런 요구사항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모든 법들이 많이 있는데, 그 두 개를, 그 모든 것들을 다 요약하면, 간단하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법이라고 하는, 지금 우리가 십계명, 계명, 법이라고 하는 것을 다루고 있는데, 이 법이나 계명을 예수님께서 표현할 때, 무엇으로 표현하냐면 사랑이라고 하는 말로 표현했다고 하는 것에 주목해 보십시오. 우리 일반적인 우리가 이 사회에서 지켜야 될 법들은 사랑은 아닙니다. 그냥 서로 피해 주지 말자. 우리 서로 방해하지 말고 살자. 최소한의 규정만 지키면서 살자 하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법은 무엇이냐면, 예수님께서 다른 말로 법을, 법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거,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모든 것들을 실천해야 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법은 최소한으로 지키는 것만 가지고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순종했다고 말할 수 없고, 최대한으로 지켜야만 그것이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어떻게 해줘야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제대로 해줬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부모가 자녀를 기를 때, 어떻게 자녀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줘야, 제대로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놀랍게도 법이 있습니다. 미국에 가도 부모가 해야 할 법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법이 있는데요. 만일 부모가 자녀들을 제대로 양육하지 않고 자녀들을 방치하거나, 자녀들에게 충분하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지 않고 자녀들을 학대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겠습니까? 미국에 법이 아주 무서운 법이 있는데요. 자녀들을 빼앗아가 버립니다. 한국에 사시다가 미국에 오신 분들이 종종 실수하는 것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우리 자녀들을 제대로 잘 관리하지 않아가지고, 그래서 자녀들을 뺏기는 위험에 처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코네티컷의 어떤 목사님이 계셨어요. 근데 그 목사님이 자녀가 아주 어린 자녀가 있었습니다. 아주 갓난아기, 아무튼 아주 굉장히 어린 자녀가 있었는데, 새벽에 새벽 기도를 가는 겁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이 새벽 기도를 가는데, 새벽 기도 갈 때 아이들을 다 들쳐 매고, 그리고 다 데리고 새벽에도 갈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죠? 아이들 자고 있으니까, 아이들 자고 있으니까, 그냥 목사님 사모님이 새벽 기도에 온 거예요. 새벽 기도 가서 기도 열심히 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난리가 난 겁니다. 집에 경찰이 와 있고, 지금 경찰자들이 불을 반짝반짝거리면서 지금 난리가 아닌 거예요. 알고 봤더니, 큰 애가 일어나가지고 엄마 아빠가 안 보니까, “엄마, 아빠” 하면서 “어디 있어>” 하고 돌아다니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거예요. 갓난아기는 집 안에서 잠자고 있는데, 그런데 미국 경찰이 와서 보니까, 부모가 돼가지고, 자녀들을 자녀들끼리 방치해 놓고 사라져 버린 이 책임 없는 부모를 어떻게 할 것인가? 난리가 난 겁니다. 보니까 집에 집 안에 들어와서 보니까, 집 안에 식칼이 놓여 있는 거예요. 당연히 있죠. 집에 식칼 없는 집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 식칼이 방치돼 있고, 그래서 위험한 상황에, 우리 아이들을 방치해 둬서, 이 자녀들을 부모로부터 빼앗아가서 그래서 고아원, 뭐죠? 양육하는 기관의 자선 기관에 그 아이들을 맡겨버리고, 그 부모님은 자격이 없다고 해서, 자녀들로부터 부모님들로부터 자녀들을 빼앗아버리는 그런 위험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빼앗겼는지 안 빼앗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 한국 부모 가운데 어떤 부모가 있었냐면, 아주 철 모르는 20, 30대 부모가 게임에 빠져서, 남편과 아내가 게임에 빠져서, 게임에 너무 열중한 아버지 게임에만 몰두해 가지고, 두 사람이 게임을 하다가, 결국 그 갓난아기에게 젖도 먹이지 않고, 그래서 결국 굶어 죽였다고 하는 뉴스를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있어요. 근데 그 아빠 엄마가 빠졌던 게임이 무슨 게임인 줄 아세요? 아이를 젖 먹여서 키우는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를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부모로부터 자녀를 빼앗아가는 그런 법이 미국에도 있고, 아마 우리나라에도 아마 비슷한 법이 있지 않겠나 싶은데요.

그렇다고 한다면 부모가 자녀들을 기를 때 자녀들에게 하루 세끼 밥을 먹이고, 그리고 옷도 제때 제 때 옷을 입혀주고, 그리고 그런 것들을 다 하면, 법대로 내가 우리 자녀들에게 할 일 다 했으니까, “부모로서 할 일은 다 했다”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게 아니죠. 부모는 법률에 따라서, 자녀들에게 법률이 규정하는 한에 의해서, 법률에 아기들은 굶기지 말라고 했으니까 애들 밥 굶기지 않고, 주고, 법률에 아이들을 제대로 옷 입히라고 했으니까 옷을 제대로 입히고, 때가 되면 학교 보내라고 했으니까 아이들을 제대로 학교에 보내면, 법률이 규정하는 바에 따라서, 내가 그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고 하면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한 것이 맞습니까? 다 한 것이 아직 아닙니까? 다 한 것이 아직 아니에요.

정말 부모라고 한다면,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법이 필요 있습니까? 법이 필요가 없어요.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모든 걸 다 해줘요. 법이 이만큼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면, 법이 요구하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녀를 위해서 어떻게 하면 내가 모든 것을, 가장 좋은 것을 할 것인가? 정말 고민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우리 자녀들을 기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길러오셨죠? 그리고 그렇게 길림을 받아서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이것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계명의 말씀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십계명의 말씀에 하나님을 향해서는 어떻게 어떻게 하라고 나와 있고, 또 이웃들을 향해서는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등등 여러 가지 계명들이 나와 있지만, 이것들이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모든 것들을 다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십계명의 말씀을 읽으면서, 따라서 십계명에서 무엇을 요구하고 있어서, “지금 내가 하는 이 행동이 십계명에 위배되는 것인가? 위배되지 않는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은 의미 없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던져야 될 질문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내가 어떻게 이웃을 더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랑의 질문을 던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성경 말씀을 한번 보죠. 신명기 11장 22절 말씀,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의지하면” 그랬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무엇을 지키는 거예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의 말씀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 말씀하고 있어요. 요한복음 14장 21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오.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나님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3절, 24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오.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오.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는 어떻게 판단이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인가 아닌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를 확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라고 한다면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법이 어떻게 요구해서가 아니라, 자녀들에게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십계명에서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더 사랑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는 것이죠.

두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요. 첫째는 하나님 사랑,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이 말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에 서열이 있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이야기할 수 없어서 순서대로 이야기를 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이냐면, 첫째 계명이나 하나님 사랑의 계명이나 이웃 사랑의 계명이나 똑같은 계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서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중요한 계명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이웃을 미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고향이 다르다고 미워하고 성격이 달라서 싫어하고, 생각하는 위치가 다르고 처지가 다르고 나보다 더 잘 나간다고 미워하고 나보다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고 더 미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0절 말씀이죠.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을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죠.

요한일서 4장 7절 8절의 말씀도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요한일서 4장 20절 말씀도 이렇게 기록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지금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우리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아니 사랑해야만 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인데, 놀랍게도 우리가 저 멀리 있는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내 옆에 와 있는 성도들, 내 옆에 와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사실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종종 우리는 이런 질문을 많이 해요. 목사님 술 마시면 됩니까 안 됩니까? 어떤 분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목사님 꼭 예배를 항상 드려야 됩니까? 예배 꼭 참석해야 됩니까? 헌금을 꼭 해야 하나요? 십일조를 해야 되나요? 교회에서 봉사해야 됩니까? 모든 질문들 어쩌면 신앙생활하면서 할 수 있는 질문일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마음의 동기가, 그 질문을 던지는 마음의 동기가 마치 우리가 기준을 자꾸만 이 세상의 율법처럼, 십계명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계명을 바라볼 때, 이 세상의 율법들처럼 가능하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도 그런 식으로 자꾸만 무시해 버리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주 위험한 질문입니다.

그 질문은 마치 하와에게 질문을 던졌던 사탄의 질문과 똑같은 질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던져야 될 질문은 “꼭 이 정도까지 해야 됩니까? 꼭 이 정도 해야 합니까? 이래야만 되는 겁니까? 저래해야만 되는 겁니까?”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보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더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이 우리들의 질문이 돼야 되는 것이고, 꼭 해야 됩니까? 꼭 봉사해야 되나요? 꼭 이거 안 하면 안 됩니까? 이런 질문이 우리들이 던질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사랑할까? 어떻게 하면 더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할까? 이것이 우리 모두의 질문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던진 질문이 바로 그러한 질문이에요. 우리 인생이 죄로 인하여 멸망을 당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굳이 이런 인간들, 내가 다시 살려야만 하느냐?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말 안 듣고 늘 생각하는 것이 악하고 늘 죄만 짓는 이런 인류를 내가 구원해내야만 하느냐?”라고 하는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우리를 구원할까? 늘 죄를 짓고 늘 타락한 우리 인생들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라고 하는 적극적인 질문을 던지셨고, 그 대답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그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는 것밖에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질문도 굳이 이런 것까지 해야 됩니까? 굳이 바쁜데 이 정도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런 피해 가는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 더 주를 사랑하고, 어떻게 더 이웃을 사랑하고, 어떻게 더 형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적극적인 그런 질문을 던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