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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계명 “그 어떤 것도 우상으로 추앙하지 말라” (출 20:4-6)

십계명 가운데서 제2계명 우리 함께 같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천주교 쪽에서는 제1 계명과 제2 계명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계명으로 보고 있다고 그렇게 설명을 드렸는데요. 그렇게 천주교 쪽에서 1 계명과 2 계명을 하나로 묶어서 보는 이유는 그 두 계명이 1 계명과 2 계명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내용의 계명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렇게 보는 것도 일리가 있을 것이고, 그렇게 나쁘게 볼 것만도 아닌데요. 아무튼 우리는 이제 개신교적인 전통, 개신교 전체가 아니라, 대부분의 전통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식에 따라서, 오늘 우상을 만들지 말라라고 하는 제2계명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제1계명과 2 계명이 같은 계명인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강조점이 다르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겠습니다.

제1계명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오직 하나님만 섬겨라” “오직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면 안 된다”라고 하는 독점적으로, 유일무이하게, 오로지 배타적으로 하나님만을 섬겨야 된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제1계명이라고 한다면, 제2계명은 무엇이냐면 그런데 그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지 말라. 형상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약간의 강조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하나님만 섬기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거기에,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는 그런 계명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우상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그 하나님의 모습을 “하나님이 과연 어떠한 분일까? 우리가 섬기는 그 하나님이 과연 어떠한 분일까?”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을 이 세상에 어떤 형상으로 빚어서 나타내는 것을 금하고 있는 계명이 제2계명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좀 더 이 계명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고 하면, 그것은 출애굽기 32장의 사건을 생각해 보면 훨씬 더 쉽게 이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출애굽기 32장의 말씀을 보면, 모세가 시내산 위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만나고 있는 그 시점에,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돌아오지 않고, 시내산에서부터 행방이 묘연해진 것을 너무 답답해했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지쳐서, 아론에게 가서 이야기를 합니다. 아론이시여, 모세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방황하고 있는데, 이때 우리를 그냥 방황하게 그냥 내버려 두지 말고, 우리를 위하여 우상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아론은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금, 목걸이, 귀걸이 다 받아가지고, 그래서 금은보화를 가지고 무엇을 만들었냐면, 송아지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 앞에서 절하고, 또 화목제와 번제를 드리면서, 축제를 벌이게 됐는데,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진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진노하셨는데, 우리가 그 출애굽기 32장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송아지 우상이라고 하는 그런 “다른 신을 섬긴 것이 잘못이구나”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요. 그러나 출애굽기 32장의 말씀을 가만히 조심히, 아주 유심히 그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면, 사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려고 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는 원했지만, 과연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여호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한번 만들어보자 해서 만든 것이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 4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2장 4절부터 6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그 송아지를 놓고서 하는 말이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낸 너희의 신이로라 하는지라.” 그렇게 말해놓고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 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죄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그러니까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송아지 우상이라고 하는 새로운 신, 송아지 우상이라고 하는 애굽에서 섬겼던 그 신을 그들이 선택한 그런, 그런 잘못이 아니라, 사실 이스라엘 민족들의 생각은 아주 단순했어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야 되겠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도대체 그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겠고, 도무지 우리들의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 여호와 하나님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거예요. 우리를 저 애굽 땅에서부터 인도해 내신 그 하나님을 우리들에게 보여달라는 겁니다. 보여주는데 송아지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이렇게 생긴 하나님이고,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이렇게 생겼으니까, 너희가 이 여호와 하나님에게 경배하라.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낸 바로 그 신,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하면서 송아지를 제시했을 때, 여호와의 축제 일로서 지키고,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으로 우상을 만들어 놓고 경배했다고 하는 것이 출애굽기 32장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못 믿겠다, 못 따르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있었어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이고, 우리를 홍해 바다를 통해서 건너게 하신 하나님이고, 지금까지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해 주신 그 여호와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재물을 다 드려서, 우상을 만든 여호와 하나님께 우리가 경배하자.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하면서, 송아지의 모습을 만들고, 아론도 내일은 “여호와의 축제일”이라고 하면서 공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으로 송아지 앞에서 예배하고 경배한 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잘못입니다.

출애굽기 2장에서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 너희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시는 이 명령은 그러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첫 번째 계명과는 약간 차원이 다른 명령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하나님의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고 하는 의미에서 물론 다른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의미도 역시 포함되겠지만, 아무튼 무엇이든지 만들어놓고 섬기는 것을 다 금하는 것이기에 이방 신상을 섬기는 것을 금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하나님을 이 세상의 어떤 형상으로, 하늘에 나는 새의 형상이든지, 땅에 있는 짐승의 형상이든지 그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서, 그런 하나님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것이 두 번째 계명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계명은 종종 우리 교회 내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켜 왔는데요. 교회의 여러 전통들 가운데서는, 그렇기 때문에 제2 계명을 우리가 신실하게 지켜야 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을 그린다든지, 예수님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다든지, 심지어 주일 학교에서 주일학교 교과 책을 만들어낼 때, 예수님의 모습을 그림을 그린다든지 해서 사용하는 것은 제2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니까,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교파가 역사적으로 있어 왔습니다. 제2계 명의 하나님을 형상화시키지 말라고,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지 말라고 했으니까, 예수님을 조각품으로 새긴다든지, 십자가의 조각품으로 예수님을 모습을 그려놓는다든지 하는 이 모든 행위들은 다 제2계명을 어기는 것이니까, 이것은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성화를 그린다든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하는 모습이라든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그림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그런 교파가 있었습니다.

사실 십계명을 이런 식으로 율법주의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경향은 우리 교회 사에서 너무나도 자주 종종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그 옛날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는 이 율법의 조항을 가지고,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켜서 거룩하게 지키라고 했으니까, 걸어갈 때는 몇 미터 이상 걸어가면 안 되고, 몇 반 자국 이상 걸어가면 안 되는 거고, 무거운 짐을 질 때 몇 kg 이상으로 들면 그건 일이고, 그 몇 kg 이하로 들면 일이 아니고, 그렇게 자세하게 규정을 해서 이것은 죄가 되고 이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그런 율법을 만들어서 “여러분, 이것을 하면 안 됩니다”라고 했던 율법주의적인 태도가 우리 교계 내에서 얼마나 자주자주 반복되는지 몰라요.

사실 십계명이라고 하는 이 계명의 말씀은 그러니까 이 십계명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서, 그 계명을 어떻게 지켜야 되는가에 대한 규정들을 만들어놓고, 이렇게 하면 죄가 되고 이렇게 하는 것은 괜찮고라고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것은 결국 바리새파적인 생각을 반복하는 행위가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역사 가운데 보면 그런 식으로 이 율법들을 적용해서, 어떠한 것을 하면 안 된다 안 된다 이것은 잘못이라고 하는 일들이 반복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다행히 우리 제가 속한 합동 교단에서는 그런 것까지는 “이건 잘못이 아니다” 잘못으로 이렇게 정죄하고, 그러지는 않고 있어서 다행이기는 합니다마는, 혹시 우리들 가운데 율법을 그런 식으로 접근한다고 하면, 그것은 바른 성경적인 접근법이 아니고, 너무나도 단순한, 너무나도 참 단편적인 접근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고, 사실은 이 계명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한 이 율법의 정신을 우리가 제대로 잘 이해하고, 이 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잘 깨달아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있는 그런 영적인 교훈을 저와 여러분들이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형상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왜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해 주시고, 왜 이런 말씀을 하시고, 왜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하시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묻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습을 형상화시키는 것을 금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우상을 만들게 되면, 하나님이 축소화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그 무한하신 하나님을 형상화해서 만들어 버리는 그 순간, 그것은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축소화시키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우리 부모님을 너무 사랑하고 좋아한다고 하십시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늘 생각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정말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 우리들의 휴대폰 안에 무엇을 가지고 있냐면, 우리 부모님의 사진을 가지고 있을 수가 있겠어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 사진을 보면서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생겼지 우리 어머니가 이렇게 생겼지. 그 사진을 보면서 아버지를 생각하고 어머니를 생각하는 겁니다. 정말 이것은 좋은 일이에요. 나쁜 일이에요? 좋은 일이에요. 사진이라고 하는 것이 어머니를 생각하게 하고 아버지를 생각하게 하는 아주 훌륭한 도구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요 그 사진을 너무나도 좋아한 나머지, 집에 왔는데 안방에 엄마 아버지가 계시는데, 엄마 아빠한테는 가보지 않고, 사진 보고, “엄마 아버지 안녕하셨습니까? 회사 잘 다녀왔습니다.” 그러면 되나요? 안 되나요? 말도 안 되는 거죠. 사진이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를 생각하게 하고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수단으로써 활용될 수 있는 것인데,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부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인 것처럼, 하나님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버리면 축소화되어 버려서, 결국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게 되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인데요. 축소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대치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대치화. 축소화에 이어서 대치화가 되는 것인데요. 예를 들자면 한 임금님이 있습니다. 그 임금님이 어떤 명령을 내립니다. 어명을 내립니다. 그러면 그 어명을 받드는 신하가 백성들에게 가서 왕의 명령을 전달하면 이 백성들은 이 왕의 어명을 전달하는 신하의 말에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화가 왕의 명령을 제대로 전달하지 아니하고, 마치 자기가 왕인 것처럼 왕의 권위를 빙자해서, 왕 노릇을 그 신하가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건 제대로 된 것입니까? 잘못된 것입니까? 잘못된 거예요. 바로 이 하나님을 형상화 만드는 그 축소화의 위험이 바로 연결되는 것이 무엇이냐면, 대치화가 시키는 것, 대치화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참되신 하나님은 온데간데 사라져 버리고 하나님을 대신하는 어떤 한 형상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는 겁니다.

마치 출애굽기 32장에 기록되고 있는 말씀처럼,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송아지를 만들어 놓은다고 한다면, 그 송아지를 처음 만들 때의 의도는 아마 진지했을 것 같아요. 우상을 처음 만들 때의 그 심정만큼은 그래도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게 되는 그 순간, 그들은 누구를 섬깁니까? 송아지를 섬기는 거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만든 그 송아지가 하나님의 영광을 독차지해 버리고, 그 모든 영광을 다 빼앗아가 버려서,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송아지를 섬기게 되는 그런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대치화가 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모습을 희미하게 가려버리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어느 곳에든지 다 계신 하나님,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그 영광이 그 어느 곳에도 있는 것이 하나님의 모습일 텐데, 그 하나님의 모습을 송아지의 모습으로, 어떤 우상의 형성으로 대치화시켜 버린 그 순간, 더 이상 하나님은 어느 곳에도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그곳에만 계신 하나님, 그 앞에서는 두려워 떨면서, 그 앞에서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벌벌벌 떨고, 정말 진지하게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같지만, 그 송아지 혹은 그 우상 앞에서 걸어 나오게 되는 그 순간에 더 이상 하나님은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될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살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모습을 가려버리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고요. 더 나아가서 제일 큰 위험이 있다고 한다면, 결국 그렇게 우상화된 하나님은 우리들의 숭배의 대상,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들의 수단으로 전락화 되어 버리는 수단화의 결과로 빚어지게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만유의 주 하나님이시라고 한다면, 온 세계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 앞에서 우리가 늘 겸손하게 서게 될 텐데, 하나님께서 축소화돼서, 그리고 우리들이 만질 수 있고, 우리가 움직일 수도 있고, 내 뜻에 따라서 이곳에 놓다가 저곳에 넣어 놓을 수도 있고, 내가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어떤 물체로, 형상으로, 하나님이 바뀌어 버리게 되면 얼마나 편리한지 몰라요. 그 하나님을, 형상화된 그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져가는 겁니다. 이곳에 가져가서 하나님 이곳을 지켜주세요. 이곳에 가져가서 하나님 이곳을 지켜주세요. 내가 원하는 것으로, 내 사업장으로, 내가 원하는 것으로 마음대로 가지고 가서 하나님을 내 뜻에 따라 나에게 복을 주는 수단으로 만들어 버리는 수단화가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서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우상을 만들려고 하는 그 욕구가 왜 나오는가를 우리는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출애굽기 20장 4절의 말씀에서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사람들이 우상을 만드는 그 이유가 바로 우리 자신의 욕구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 먹고 잘 살고, 우리가 행복해지고 우리가 복을 받기 위해서, 그 하나님을 적절하게 잘 이용해서, 내가 잘 살고자 하는, 그런 이기적인 마음을 충족시켜 주는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우상을 만드는 사람들의 욕구는 뻔해요. 그 신을 통해서, 우상을 통해서 내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그 이유 때문에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셨고, 하나님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 그 하나님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능력이 탐이 나는 것이고요. 그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그 전능하심이 내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내가 적절하게 이용하고 적절하게 사용해서, 내가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그 방법을 누리기 위해서, 그 하나님을 철저하게 수단화시키는 것이 형상으로 만드는 잘못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하나님 인격으로, 표현 자체가 좀 어폐가 있죠? 신격으로, 하나님 그 존재 그 자체만 너무나도 감사하고 너무나도 정말 좋아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그런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은 늘 이런 죄들을 반복해 왔습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우상은 만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우상화시켜 버린 것들이 많습니다. 사무엘상 4장에 보면 언약궤가 그 가운데 하나였는데요.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임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형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형상인데, 그 언약궤를 사람들은 우상처럼 생각했습니다. 이 언약궤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이 언약궤는 우리가 가지고 가는 곳에서, 우리들에게 축복을 해 주실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곳에는 가지고 갈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에서 불리해지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려는 마음은 없는 채, 그 언약개를 끌고 전쟁터로 가서, 그 하나님이 우리의 수단이 되어 주고, 우리를 위해서 봉사해 주는 신하가 되어서, 우리에게 전쟁을 승리케 해달라고, 전쟁의 승리를 선물해 달라고 사용하는 주인의 말을 잘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마치 알라딘의 마술 램프 안에 나오는 거인을 이용하듯이, 언약궤를 우상처럼 사용했던 것이 사무엘 상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사사기 8장 27절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은 금으로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사실 에봇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하나님께서 에봇을 만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사장들에게 복식을 만들면서 에봇도 만들어 가지고, 그 에봇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것이 에봇이라고 하는 것인데요. 그 에봇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전쟁에서 나가야 될 것인지 나가지 말아야 될 것인지, 이런 결정을 할 때 이렇게 해야 될 것인지 저렇게 해야 될 것인지 그런 결정들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뜻을 듣는 중요한 수단이 에봇이었는데요. 그 에봇이 너무나도 편리한 겁니다. 너무나도 좋은 겁니다. 이 에봇을 통해서 자신들의 유익을 다 충족시킬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에봇을 금으로 만들었어요. 금으로 만들어 가지고 이 사사 시대에는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설려고 하는 그런 마음의 자세도 없이, 이 에봇을 우상처럼 생겨서 섬겼기 때문에, “그 에봇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올무가 되었다”라고 사사기 8장 27절의 말씀 가운데서 기록하고, 그렇다고 본다면 사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우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해야 될 필요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모든 것, 실제로 우리 한국 교회 내에서는 우상처럼 그 모든 것들을 다 다루어 온 그런 실수의 역사가 있습니다. 성구라고 하는 것 강대상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한다고 하는 그 모든 성구들을 우리들이 거룩하게 다룬다고 하는 것이 우상화시켜서, 그래서 이 우상화를 시키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이것을 함부로 다루면 화를 입을 것이고, 이것을 잘 다루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잘못된 생각으로 우상화시킨 적이 많은데요. 특별히 십자가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 가운데서는 십자가 앞에서 복을 비는 겁니다. 교회 와가지고 십자가에 있으면,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면서, 십자가에서 복을 달라고 빌고 있다고 한다면, 십자가니까 괜찮은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우상화 만들어 버린 잘못이기 때문에, 그래서 1957년 합동 교단에서 강대상 위에 십자가를 붙여가는 것을 금지하는 결정을 내렸어요. 그리고 2015년 제10차 총회에서도 그 결의를, 번복하지 않고 그대로 하기로 유지했는데, 사실 저는 그러한 결정 자체는 별로 바람직한 결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지, 그림에서 예수님을 그리지 말라든지, 십자가를 사용하면 안 된다든지, 이렇게 율법화시켜서 바리새주의적으로 이건 하면 되고, 이건 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된다는 식으로 일일이 율법화시키는 것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고 한다면, 제가 가서 그런 결정들을 좀 풀려고, 이제는 교회에 자체적으로 맡겨서, 교회가 달고 싶으면 달고, 달고 싶지 않으면 달지 못하도록 자유를 주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하는 것으로 결정을 이끌어내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요. 아무튼 그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우상이 될 수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율법화시켜서 해라, 하지 마라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으로 정말 그러한 것들을 우상화시켜서 섬기지 않는 그런 마음의 자세가 필요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예 못 만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를 다 만들라고 하셨어요. 에벤에셀이라고 하는 돌을 만들어 세워서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게 하라고 말씀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요단강 돌을 세워놓으라고 말씀하시기도 하고, 또 주님께서는 떡과 포도주를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나도록 그렇게 하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나게 하셨는데, 그러한 것들을 우상화시켜 버려서, 그것을 우상처럼 섬기는 것은 잘못이겠지만, 그러나 그 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십자가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우상화의 경고를 하면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특별히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배당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예배당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우상으로 전락해 버릴 가능성들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 교회 내에서 예배당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과 동격인 양 그렇게 선전하고, 그래서 예배당만 만들기만 하면, 예배당을 건축하기만 하면, 그 가정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부추기도 하고, 그래서 건축 헌금을 많이 하게 만들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베푸실 것이라고, 그렇게 선전을 해서, 그래서 아름답고 멋진 성전을 짓기만 하면,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우상화시키는 그런 잘못들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저질러 왔어요. 저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고, 그렇게 하지 않아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역시 새 예배당이 우리의 우상이 되어 버릴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만 온전히 섬기는 그런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만드는 것에 대한 경고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데,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죄 없다 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죄를 갚되 3, 4대에까지 이르게 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요. 이 표현만 보면 마치 하나님은 질투하는 남편처럼, 혹은 어쩌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조폭처럼, 우리를 향해서 위협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면 배신하면 우리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조폭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겁니다. 실제적으로 결과도 똑같은 결과처럼 느껴질 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조폭과 같아서 이런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말씀을,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또한 하나님을 수단화시켜서 그리고 우상화해서 그래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할 것인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사랑의 마음으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을 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을 제대로 섬겨야 되는 것인데,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수단이 아니라,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해 나가는 그런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가감이 없는 하나님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어떠한 형상으로 만들어서 우리가 활용하기 좋은 그런 좋은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수단화시켜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이유는 이 사람을 내가 사랑하면 이 사람이 나에게 유익하겠구나. 저 사람을 사랑해 주면 이 사람은 나에게 헌금을 많이 하겠구나. 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저 사람이 많은 능력을 베풀거나. 그걸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이 아니라, 낮고 천한 저희들, 아무 짝에 쓸모가 없어도 아무런 내려올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인간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있는 모습 그대로 이 모습대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겨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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