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눈으로 본 십계명이라고 하는 주제로, 우리가 십계명을 하나씩 하나씩 한 조항 조항씩 살펴보고 있는 가운데, 이 시간에는 “살인하지 말라”라고 하는 제6계명을 살펴보게 됐습니다.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이 계명은 단순하고 명확하고 아주 쉬운 계명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말의 뜻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할 수 없으신 분 계신가요? 없죠? 아주 간단한, 누구나 다, 다 알 수 있는 쉬운 명령입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했으니까,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요. 사람을 죽인다면, 하나님께서 금하신 제6계명을 범한 중한 죄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십계명을 살펴볼 때에, 단순히 그 문자적인 의미가 무엇인가에만 집중해서 살펴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계명을 주셨는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서, 묵상하고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누차에 걸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주신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계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일까 묵상하면서,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대로,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그런 계명을 주셨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이웃들, 우리 가족들, 우리 형제자매들, 바로 내 옆에 있는 바로 이분들, 그분들을 적대시하면서 살아갈 것이 아니라, 나의 형제로 여기고, 또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서로 사랑하며, 아끼고 존중하며, 행복한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 그것에 가장 반대되는 행위인, “살인하지 말라”라고 하는 계명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람은 누군가요? 사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주셨습니다. 옆에 사람 한번 볼까요? 하나님의 형상처럼 보입니까? 하나님이 저렇게 못 생겼나? 잘생겼습니까? 예.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 분이시죠? 하나님은 영이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신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에게 형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형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을 가리켜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다고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부모님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죠? 부모의 형상을 닮아서 태어나게 돼 있습니다. 우리 이용임 권사님 손녀딸을 이제 안게 됐는데, 이 손녀딸의 얼굴 속에 누구의 얼굴이 보이겠어요? 예. 부모의 얼굴이 보이고, 우리 아이의 얼굴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얼굴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 얼굴이 보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잘 모를 수 있으나, 그러나 그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면, 어쩜 그렇게 똑같이 닮았는지, 참 신기하고 놀랍기가 그지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자녀들은 부모를 닮아서 태어나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경에서는 우리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이웃들은 그냥 아무나가 아니라, 그냥 별볼 일 없는, 아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 바로 내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오, 하나님의 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바로 내 옆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옆사람을 보면서 한번 이야기합시다. 하나님의 자녀시군요!
하나님의 자녀를 우리가 당연히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우리 이웃들을, 내 형제자매들을 미워한다면, 더 나아가서 미워하는 것의 가장 큰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살인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만일 그런 사람들을 살인하게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고, 존중하고 아끼고 돌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죠. 미워하거나 더 심지어 더 나아가서 죽인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주 큰 잘못이고, 비극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아주 큰 죄악에 해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죽이게 되면, 사람을 죽이면, 그것은 단순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사라지는 것만이 아니라, 사실은 그 치명적인 결과가, 우리들에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과 함께 어울려져서 함께 살아갈 때, 행복을 느끼게 되고, 그리고 기쁨을 느끼게 되고, 여러 가지 만족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내 옆에 있는 어떤 그 사람을 없애버리고, 죽여버린다고 한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그 사람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없어짐으로 말미암아, 나 자신에게도 아주 치명적인 결과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C.S. 루이스라고 하는 영국의 문필가가 한 말이 있는데요. 그 사람은 뭐 무슨 얘기를 했냐면, 한 사람이 내 곁에서 사라지는 것은, 한 사람이 내 곁에서 사라지는 것은, 그 사람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게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장점들까지도 다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한 사람이 없어지면 그 사람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게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장점들, 그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나올 수 있는 모든 행복과 모든 강점과 그 모든 것들이 함께 다 없어져버리는 것이라고 C.S. 루이스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죽였다고 합시다. 자기의 부모를 죽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죽이게 되면, 그러면 그 부모가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 순간에 고아가 되는 겁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부모의 돌보심을 받고 놀라운 그 축복을 누리면서 살 수가 있는데, 그 부모를 배척하고 죽이고, 그리고 내게서부터 끊어버리는 그 순간, 나는 그 순간부터 고아가 된, 고아, 아무도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수 있는 부모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어떤 장점이 있어도 즐거운 일이 있어도, 그 즐거움을 함께 즐거워해줄 어머니가 안 계신 것, 아버지가 안 계신, 만일 어떤 사람이 배우자를 죽이게 된다고 한다면 어떤 결과가 되는 겁니까? 이제부터는 미망인이 되는 겁니다. 친구를 죽이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그때부터는 내가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난 뒤에, 가인은 분노로 가득 차서, 결국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는데, 결국 그렇게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아벨을 없애버림으로 말미암아 가인은 그때부터 이제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벨이 누구냐? 아벨은 바로 가인이 돌보아 주어야 할 동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그 아벨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돌봄을 받고, 아끼는 관계 가운데, 형제가 우애하면서 살아갈 때, 아주 많은 유익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벨이 사라지게 되는 그 순간에, 더 이상 그 형제 사랑의 그 관계가 없어져 버리게 된 것이죠. 형제의 우애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요. 우리 자녀들을 기르다 보면, 우리 자녀들이 얼마나 많이 싸우는지 모릅니다. 쌍둥이 아이들을 둔 가정에 보면, 그 쌍둥이가 서로 얼마나 경쟁을 하고 얼마나 시기하고 질투하고 다투는지 모릅니다. 제 딸들은, 두 딸을 뒀는데, 큰애와 작은 애의 나이 차가 4살 반이나 나는데, 이 4살 반 어린 이 아이가 큰 아이에게 도무지 지려고 하지 않고 얼마나 싸우는지 몰라요. 막 싸우는데,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이 밖에 나가서 동생이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또는 언니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 순간에 그 동생이나 언니를 위해서 분노하면서 보호해 주려고 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자매들이더라. 평상시는 늘 싸우는 것 같아도, 밖에 나가면 자기 형을 도와주려고 하고, 동생을 도와주려고 하고, 지난번에 우리 유년주일학교가 야외에 가 가지고, 축구를 하다가 우리 주일학교 한 학생이 잘못 쳐가지고 공에 맞아서 누군가 다쳤을 때, 형제가 달려가서 막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야, 평상시에나 잘하지.” 그런데 자기 형제를 죽이면, 그때부터 외톨이가 되는 것이죠. 가인은 그 아벨 동생을 죽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더 이상 가인을 사랑하고 돌보아줄 동생이 사라져 버린 것이고, 그래서 결국 가인은 누군가 나를 죽일까 봐 두려워하는 가운데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내가 사람들 가운데 사는 가운데, 누가 나를 죽이면 어떡합니까? 나를 향해서 누가 돌을 던지면 어떡하나 하면서 불안한 가운데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이 바로 가인의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사랑하며, 형제와 우애하며 그리고 아끼고 살아갈 때, 우리가 그나마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이 계명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 이들의 이웃과 형제를 적대시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행복하게 지내라고 이 말씀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살인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살인하지 않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 계명을 따르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살인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더 적극적으로 내 형제와 자매와 이웃들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살인하지 말라”라고 하는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사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21절부터 26절의 말씀 가운데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옛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여기서 욕입니다. 바보라고 하는 말입니다. 바보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재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 급히 사과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내게 이르느니 내가 한 푼이라도 남김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아멘. 이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인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이 제6계명을 잘 지켰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우리 이웃을, 우리 형제자매를 진실로 사랑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제6계명은 여러 가지 해결해야 될 문제들이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는데요. 첫 번째는 그러면 사형 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사형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좋은가”라고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우리나라에서 존재하는 사형 제도를 찬성하는 것이 좋은가요? 찬성하지 말고 사형 제도를 폐지하자고 하는 쪽에 의견을 더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 크리스천들로 해야 될 일일까요? 어느 쪽으로 의견을 내야 옳을까요? 못 들었습니까?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사형 제도를 유지하도록 하는 게 좋은가요? 사형 제도를 없애는 것이 좋을까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사형 제도가 허용되어 있고, 또 하나님께서는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들에 대해서, 사형으로 다스릴 것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에, 사형 제도를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크리스천들 중에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어설픈 논리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있다고 해서, 오늘날에도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 보면 한 남자의 여러 명의 아내를 둔 일부다처제가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형이 죽으면 형수를 동생이 차지하는 형사취수 제도가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노예를 부리는 그런 노예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한 남자가 여러 여성과 함께 사는 것이 괜찮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없어요. 성경에 있었다고 해서 오늘날에도 그대로 행할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형 제도가 성경에 있다고 하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오늘날에도 사형 제도를 그대로 유지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논리가 허약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국가권력이 사형 제도를 가지고 있는 것 자체는 제6계명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제6계명은 개인에게 주시는 명령이지, 국가에 관한 것은 아니겠고요. 따라서 국가가 사형 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해서 사형시키는 것이 그것도 살인이라고 비난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 제도가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서 억울한 희생자가 생길 수가 있고, 억울한 희생자가 생겼을 때, 그것을 도무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하는 점에서, 사형제도를 폐지하거나, 아니면 사형 제도가 존속한다고 할지라도, 아주 신중하게 집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이 가져야 될 자세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두 번째로 던져야 될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과연 집총을 거부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군대에 끌려가는 것 군대의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요? 우리 크리스천은 하면 안 되는 일인가요? 제6계명에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했는데, 군대에 가게 되면 무고한 살상을 해야만 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군대에 가지 못한다고, 살인의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군대에 갈 수 없다고 말하는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역시 국가가 하는 그 전쟁은 개인에게 준 살인을 하지 말라고 하는 그 계명과는 별개의 것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국가의 전쟁은 살인죄와는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살인죄라고 하는, 그런 살인을 하지 말라고 하는 이 계명에 근거해서, 집총을 거부하거나 군대에 가는 것을 국방의 의무를 등한시하는 것은 그것은 바른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전쟁에 대해서 제대로 준비하지 않는다고 하면, 사실은 내가 살인하지 않는다고 하는 목적으로 전쟁을 참여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더 큰 희생,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집총을 거부하고 군대에 안 간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어설픈 논리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총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비난해서도 안 됩니다. 특별히 안식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좀 과도하게 해석해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이 계명을 과도하게 해석해서, 안식교를 믿는 사람들은 군대를 거부해서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가 이번에 최근에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 해서 인정을 받는 그런 결과가 있기 있었습니다마는, 아무튼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을 무조건 비난할 것이 아니라, 또 그들이 살인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 마음만큼은 존중해 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크리스천들이 군대에 간다고 할지라도, 군대에 가서 국가가 시키는 대로 무조건 다 할 것이 아니라, 사실 부당한 국가의 명령에는 거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5.18과 같이 자국의 국민을 향해서 총칼을 들이대고 죽이라고 하는 그런 부당한 명령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국가에 속한 군인으로서 그냥 하는 것이다”라고 그냥 할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내가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때 거부할 수 있는 그런 정당한 용기가 우리들에게 필요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세 번째는 낙태의 문제입니다. 낙태는 아직 태어나지 아니한 생명을 없애는 것이 낙태인데요. 낙태도 살인죄에 해당합니까?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생명으로 주셨기 때문에, 태아의 생명을 끊는 낙태는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이 계명을 어기는 금지하신 살인죄를 저지른 것임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법으로 낙태가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이미 수많은 나라에서 낙태를 허용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국가 법령으로는 살인죄가 안 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죄라고 하는 사실 기억하고 우리는 낙태를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우리 크리스천들이라고 할지라도, 낙태를 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경우가 예외적으로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고 있는 점도 있기 때문에, 아무튼 무조건 낙태한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할 것은 아니겠지만, 원칙적으로 낙태를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네 번째로 자살의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도 역시 살인에 해당이 될까요? 됩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인데, 그것을 이웃을 죽이는 것이든,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자살을 하지 않는 것이 성도의 바른 자세라고 믿습니다. 물론 자살한 사람들은 반드시 지옥에 간다고 그렇게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믿음에 달려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더 중요하게는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자살했다고 하는 이유만으로, 지옥에 간다고 함부로 말을 해서, 유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자살했다고 해서 생명이 바로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요. 자살한 이후에도 그 시간이 얼마만큼이든 회개할 기회가 주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사람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튼 자살은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살인을 금하시는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자살을 시도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6계명은 살인의 계명뿐만 살인을 하지 말라고 하는 계명이 아니라, “살상 자체를 금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do not kill” 죽이지 마라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그러니까 그 뒤에 사람이라고 하는 목적어가 없어요. 그러니까 죽이지 말라고 제6계명을 번역해 놓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도 하나님 앞에 잘못이지만, 짐승을 죽이는 것도 역시 잘못이다. 제6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주장을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들어볼 리가 없죠. 우리 교회에서만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혹시 있다고 한다면,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원어에서 히브리어 원어에서 제6계명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인 “라츠”라고 하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지 말도록 제6계명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이지, 단순히 짐승을 죽이는 것이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을 우리들에게 식물로 주신다고 허용해 주셨으므로, 우리가 짐승을 식용으로 죽여서 먹는 것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했는데, 이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 사람만 안 죽이면 이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 계명의 궁극적이고 적극적인 그 계명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이웃을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존중하며 사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로 사랑을 베풀고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으로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고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는 것이 이 계명의 바른 뜻임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