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사랑의 10번째 정의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은 온정주의에 빠져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감싸고도는 경향을 종종 보이는 우리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다. 참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할 수 없다.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결국 패망하게 될 터인데,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불의를 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덤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중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불의를 행할 때 그 불의에 동참할 때가 있다. 아담은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것에 동조했고, 삽비라는 아나니아가 거짓말을 하는 것에 동조했다. 참된 사랑은 불의를 행하는 것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불의를 볼 때에 분노하고 정죄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 사랑에 대한 첫 번째 정의에서 “오래 참는 것”이라고 정의했고, 여섯 번째 정의에서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했을 뿐만 아니라, 여덟 번째 정의에서 “성내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성경의 수많은 구절 중에서 우리들의 구미에 당기는 한 부분만을 선택해서 우리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때가 많은데, 어떤 사람들은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씀만을 선택해서 누군가 불의를 행하는 일을 볼 때에 정죄하고 비난하고 분노하면서 자신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그런 일을 한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할 때가 많다.
하지만 성경은 “불의를 볼 때에는 정죄하거나 분노해도 좋다”고 기록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더러운 죄를 짓는 사람들을 향해서 비난을 서슴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그건 참된 사랑이 아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는 말씀도 자녀들을 향해서 윽박지르고 혼내는 것을 정당화하는 말씀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볼 때면, 그 잘못을 행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그 잘못에서부터 돌이키게 만들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류가 죄를 지을 때 안타까워하셨다. 심지어 한탄하시고 근심하셨다는 표현까지 성경은 사용한다(창 6:6).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그냥 심판해버리시고 끝내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모든 인류의 죄짐을 지고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주셨다. 그래서 우리를 회복시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