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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사랑 강해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사랑 강해 15

사랑에 대한 15가지 정의 가운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는 참고 견딘다는 것이다. 첫 번째 정의에서도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고, 8번째 정의에서도 성내지 않는 것이라고 했고, 12번째 정의에서도 모든 것을 참는 것이라고 했는데, 마지막 정의에서도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참고 견디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참지 못하고 쏟아낸 말 한 마디가 가정을 파괴하고 사랑의 관계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참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그런데 마지막 정의에서 모든 것을 견딘다고 했을 때, 이것은 그 대상이 고난이나 슬픔을 참고 견딘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앞에서는 화가 날 때 참는 것을 이야기했다면, 15번째 정의에서는 고난을 참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것을 견디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마 10:22, 딤후 2:10, 12, 히 12:2-3에서 사용된 적이 있는데, 여기서 모두 고통을 참는다는 의미로 사용된 바 있다. 사랑은 무엇인가? 고통을 참는 것이 사랑이다.

왜 고통을 참아야 하는가? 사랑을 하는 것은 쉽고 편한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노래 가사처럼 사랑은 마냥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쓰라린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도 사랑을 하기 원했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대적하였고, 사도 바울도 사랑의 복음을 전하려 했지만 그로 인해서 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다. 우리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견디는 것이 필요하다. 견디는 것은 자신의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을 뜻한다. 눅 2:47과 행 17:14에서는 견딘다는 헬라어 단어를 머무르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랑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의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도중에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다. 남편의 자리에서 혹은 아내의 자리에서, 혹은 부모의 자리에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곧 견디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을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견디신 분이시다. 주님 앞에 다시 나아가야 한다.

지금까지 사랑의 15가지 특성을 모두 살펴보았는데, 우리가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성경적인 사랑을 할만큼 뛰어나지 못하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 사랑 강해 14

사랑은 기대로 표현되게 되어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들은 아이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품는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기대하지 않는다. 지나가는 낯선 사람에게 기대할 것은 별로 없다. 그래서 사랑은 항상 기대로 표현된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기도 한다. 부모가 자녀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과도한 기대 때문에 우리들의 자녀들은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사랑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기대하는 것인데, 왜 오히려 이 기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그 이유는 기대를 하는 우리에게 그만큼 참을성이 부족해서 일 수 있다. 또는 기대하는 모습이 믿어주지 못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한 과도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대가 과도한 욕심에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기대를 저버리기도 한다. 그 동안 계속된 실망감들이 축적되어서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배우자에 대한 기대를 포기해버리고, 자녀에 대한 기대를 포기해버린다. 요즘에는 교회에 대한 기대마저도 포기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 모두가 그동안 기대했다가 실망했던 경험들 때문이다.

충격적인 것은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기대를 저버리는 것을 장려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욕심과 집착 때문이라고 진단하면서, 그 모든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고 사람들에 대한 기대를 모두 저버리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참된 해법이 아니다.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는 사탄의 속삭임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어떻게 우리는 늘 실망감을 안겨주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주님에게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악을 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기어이 십자가에서의 보혈을 통해 구원해주신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 사랑 강해 13

믿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뚜렷한 모습이다.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믿게 되지만, 사랑이 식으면 그 사람을 도주지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믿는 모습으로 사랑은 표현되는 것이다. 특히 남성들은 자신을 믿어줄 때 사랑받는다고 느낀다고 한다. 여성들도 차이는 있겠지만 믿어주는 것을 통해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믿지 못한다. 그 이유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동안 수많은 실망감을 안겨주고 또 안겨준 그 사람을 믿는 것이 어렵다. 하지만 성경은 믿을 수 있을 경우에만 믿으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믿으라고 한다. 사랑은 믿어주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녀들을 불신하는 태도를 보일 때가 많다는 것이 아쉽다.

그런데 무조건 믿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 그렇게 믿는 것이 바람직할까? 사실 성경에는 믿지 말라는 말씀도 나온다. 영들을 무조건 믿지 말고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고 권고하고 있다(요일 4:1). 사실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다른 목적을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교인을 받을 때 함부로 받을 것도 아니고 직분자를 세울 때 함부로 직분자를 세울 것도 아니다. 더 나아가 믿는다고 해서 아무런 검증 시스템이 없이 또는 계약서 없이 일을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는 말씀은 맹목적인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아무리 실망을 시키는 한 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 대한 가능성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 사람을 믿어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반면 사람을 믿어주지 않으면 아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어거스틴은 방탕한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그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기도했다. 결국 그가 회심하게 되었다. 모니카가 믿은 것은 어거스틴이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아니었다.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늘 넘어지고 실수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야 했다. 하지만 모니카가 믿은 것은 어거스틴이 결국 주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이었다. 주 안에서 소망을 가진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이라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가? 주님은 우리가 완전히 죄로 인하여 구제불능의 상태였을 때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셨다. 대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까지 회복시키시고 구원해주셨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 사랑 강해 12

사랑의 12번째 정의는 모든 것을 참는 것이다. 이미 첫 번째 정의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는데, 다시 12번째에서 모든 것을 참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인간의 연약함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한두 번 참을 수는 있겠지만, 얼마가지 못하고 이내 폭발해버리기 때문이다. 사랑은 참는 것으로 시작하고, 참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며, 참는 것으로 완성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얼마가지 못하고 늘 실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지고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다. 늘 실패할 때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죄와 허물을 용서받아야 하고, 다시 새 힘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도를 닦는 방법으로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출가하여 산속에서 도를 닦는 것을 권장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도가 트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은 도가 트인 것이 아니라 복잡한 상황을 피해 도망간 것뿐이다. 내가 참을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증명되는 것이지, 산속에 들어가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그래서 괜찮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은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첫 번째 정의와 12번째 정의 사이에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첫 번째 차이는 12번째 정의는 그 범주를 모든 것에 대하여 참으라는 것에 있다. 참을 수 있는 것만 참는 것이 아니라, 도무지 참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참아야 한다. 두 번째 차이는 첫 번째 정의가 “기다린다”는 의미에서의 참음을 의미한다면, 12번째 정의는 “견딘다” “절제한다”는 의미의 참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가 고전 9:12에서 사용된 바 있는데, 바울 사도는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그 권리를 참았다고 표현한다. 그러니까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다고 했을 때, 그 참음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화낼 것 다 화내고, 신경질 낼 것 다 내고, 내 권리를 전혀 포기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기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부모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왜 왜 권리를 사용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같은 사랑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로 인하여 멸망당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다움을 포기하셨다, 그리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다(빌 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