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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위로(고후 2:1-11)

교회는 거룩하고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니다. 오히려 죄인들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교회는 병원과 비슷하다. 아주 훌륭한 병원의 병상에는 건장한 사람들이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각종 환자들이 누워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는 의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셨기 때문이다(눅 5:31-32).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치료하시는가? 먼저 주님은 죽었던 우리를 살려주셨다.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수혈을 받고 우리가 살아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생명을 건지는 수술 이후에는 재활이 필요하다. 아직도 옛사람의 습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 우리가 영적으로 온전히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영적인 재활훈련을 통해서 거룩해져가야 한다. 그런 재활을 위하여 주님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사용하신다.

그래서 영적인 환자들인 성도들이 함께 서로 사랑하고 도우면서 영적인 건강을 회복해가는 것이다. 목사도 의사가 아니라, 참되신 의사이신 예수님의 치료가 필요한 동료환자일 뿐이다. 다만 교회 안의 여러 지체들이 자신이 가진 은사를 사용하여 서로를 영적으로 도와주어서 건강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성도들이 서로 도와서 영적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데 있다.

그런데 만일 교회 안에 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모른 척 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방법으로 도와주어서(약 3:1; 빌 2:1-2), 그 죄를 버리고 회개하여 영적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고린도 교회에는 문제가 많은 성도가 있었다. 바울 사도는 그 문제를 접하게 되었을 때, 그냥 모른 척 하지 않았다. 바울 사도는 책망하기도 하고 권면하기도 하고, 교회로 하여금 징계하게 하기도 해서 그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결국 그 사람은 회개하였다. 고후 2:1-11은 이런 상황에서 쓰여진 말씀이다. 바울 사도는 이제 그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하였다(고후 2:7). 한 때 그 사람은 바울 사도를 비난하기도 했었을 것이고, 교회 안에 큰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왜 그런가? 징계의 목적은 징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회복시키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종종 죄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다가 결국에는 그 죄를 지은 사람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반대로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고 하고 살려야 한다고 하다가 결국 악을 방조하고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적인 방법은 그게 아니다. 죄에 대해서는 강하게 책망할 필요가 있으면서도, 그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사랑은 포기하면 안 된다. 우리에게는 그런 마음이 필요하다. 마치 어머니가 자식의 죄는 극도로 미워하면서도 자식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런 마음을 성도들에 대해서 가져야 한다. 그렇게 될 때, 한 때 실패자였던 사람 혹은 죄를 지었던 사람도 회복되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어거스틴이 그랬고, 바울 사도도 그랬다. 그들은 한 때 방탕한 사람이었고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국 회개하고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사용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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