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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삼상 26:1-12)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살려준 적이 있었다. 그때 사울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그런데 사울은 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3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십 광야로 출정한다. 그때 그 사울의 회개는 순 거짓이었는가? 그때 그 사울의 회개는 진정성이 없었던 것인가?

그때 그 사울의 회개는 순 거짓이었으며 위기를 모면하는 진정성이 없는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늘 현재의 모습으로 과거의 모든 행위를 판단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말이다. 아무리 선하고 착하게 살았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중에 실수 하나를 하게 되면, 그 이전의 모든 것들을 다 위선으로 평가해버리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진정성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은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정직한 사람과 부정직한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어떨 때에는 진실하기도 하지만, 어떨 때에는 진실하지 못할 때도 있다. 사울은 적어도 다윗의 용서를 대하는 순간만큼은 진실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래가지 못했다. 누군가 옆에서 다윗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다고 이야기하자, 그 이야기에 솔깃해서 넘어가 버렸다.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권면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광야의 이스라엘 민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해서 망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홍해에서 세례를 받고, 만나로 성찬식을 했고, 반석에서 나는 신령한 음료를 마셨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은혜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망했다. 그들은 그 믿음을 계속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보호하셨다. 사울이 3천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왔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지키셨다. 오히려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때 아비새가 말했다. 사울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버리겠다고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사울을 죽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고 이야기했다. 그 순간에 다윗은 그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것이 사울과 다윗의 차이점이다. 다윗에게는 죄를 저지르라고 부추기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사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죄를 저지르라고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다윗은 사울과는 달리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았다.

믿음의 길은 환경 탓을 할 게 아니다. 다윗이나 사울이나 그 주변에 악을 부추기는 사람이 똑같이 있었지만,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실 때, 모두가 도와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롱하고 침을 뱉을 때, 묵묵히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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