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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에게 주어진 기회(삼상 24:1-7)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를 마치고 다시 다윗을 잡기 위해 엔게디 광야로 갔다. 그러다가 일을 보기 위해 홀로 굴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가 들어간 굴은 다윗의 일행들이 숨어 있던 곳이었다. 사울이 이렇게 그 굴속으로 들어간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사울이 다윗이 숨어 있는 곳으로 가게 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다윗의 사람들은 다윗에게 말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절호의 기회이니, 사울을 죽여버리고 모든 고통을 끝내버리자고 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옷자락만을 베었다. 그리고도 마음이 찔려 괴로워했다. 실제로 살인을 해야만 살인이 아니라, 마음으로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을 저지른 것과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윗은 벌써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악이라고 하면서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을 금하였다.

오늘날 종종 이 말씀을 목회자에게 적용하곤 한다. 목사님을 대적하는 것은 아주 큰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 한국교회 안에 뿌리내려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해석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목사는 구약의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왕과 같은 직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성경적 관점이 있다면,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기름을 부음 받은 사람들이며, 목사만 제사장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다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벧전 2:9). 따라서 목사만이 기름 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건전하지 못한 생각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교회 내에서 목회자로 인하여 문제가 생길 때마다, 목회자는 성도들의 영적인 아버지이니까 거역하면 안 되고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생각은 땅에 있는 사람을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하신 말씀(마 23:9)에 배치되는 생각인데 말이다. 또한,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이니 사람이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생각은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이지만, 교회 안에서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우리가 직접 판단해서 출교시켜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고전 5:12-13)과 배치되는 것인데도 말이다.

물론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목회자들을 함부로 대하고 대적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목회자들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는 것이고, 배우고 듣고 본 바를 그대로 행하라는 것이고(빌 4:9), 가르치는 수고를 하는 자들을 존경해야 한다는 것이다(딤전 5:17). 더 나아가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성경적인 원리가 있다면, 사랑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뿐만 아니라, 기름 부음 받았기 때문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옳다(요일 4:20).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했을 때, 다윗은 시므이는 사울과는 달리 기름 부음을 받지 않았으니까, 죽여도 된다고 하지 않았다. 사람은 그 누구든지간에 사랑으로 대해야 하고, 원수를 갚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며 원수를 갚으라고 했다. 그것은 왕이 되는 가장 빠른 길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윗은 그러한 유혹을 물리쳤다. 사실 사울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쉽고 편한 길을 가라는 사탄의 유혹과의 싸움이 진정한 싸움이다. 거기서 다윗은 이겼다.

대략 천년이 지난 후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탄은 예수님께 와서 다윗에게 했던 말과 비슷한 말로 예수님을 유혹했다. 어려운 길로 가지 말고, 쉽게 왕이 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주님은 고난의 길을 선택하셨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주님은 우리를 심판하고 끝내지 않으셨다. 오히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그 길은 이제 우리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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