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사울 앞에 선 다윗(삼상 17:55-18:5)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후 사울 왕은 아브넬에게 물었다. “이 소년이 누구의 아들이냐?” 이미 사울은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가기 전에 만난 바 있다. 그때에는 다윗이 누구의 아들인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한 청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게 되자 다윗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해진 것이 많아진 것이다. 이 질문은 사울의 질문만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질문이기도 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게 되자 일약 이스라엘의 대중적 스타가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도 그러실까? 우리는 흔히 하나님도 우리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별 볼일 없으면 관심을 두지 않으시지만 위대한 일을 해내고 위대한 믿음을 보일 때 그때에서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또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별 관심을 두지 않으시지만, 성직자들이나 어떤 특별한 사람들의 기도에는 잘 응답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찔렀을 때 갑자기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게 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겐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하셨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돌아왔을 때 요나단은 다윗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사실 요나단은 다윗의 등장에 위기감을 느끼고 다윗을 향해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려면 가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요나단은 사울 왕의 아들로서 사울을 이어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이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이스라엘의 유력한 대권주자로 등극하게 될 때 요나단은 두려울 수 있었다. 사실 사울 왕은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요나단은 오히려 다윗의 친구가 되었을까?

그것은 요나단이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다윗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블레셋의 진영으로 달렸던 믿음의 사람이었었다(삼상 14:6). 그는 다윗의 등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울을 버리셨다는 선언을 하신 바 있다. 요나단은 자신의 욕심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길 원했다. 그리고 다윗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결국 다윗은 요나단과 약속을 맺고(삼상 20:14-15), 요나단을 끝까지 보호하였다. 다윗을 적으로 삼고 그와 경쟁했더라면 사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고통 속에서 살다가 결국 스스로 파멸의 길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의 친구가 되어줌으로 놀라운 은총을 입게 되었다.

우리는 원수를 만들기보다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서 친구가 되기보다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여기는 일이 참 많다. 그것도 교회 안에서 말이다. 목사와 장로가 원수가 되고, 성도와 성도가 서로 원수가 되어 멱살을 잡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서로가 파멸의 길로 간다. 서로에게 그 파멸의 책임을 전가하면서 말이다. 서로 사랑하고 친구가 되었더라면 함께 서로 유익이 될 텐데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하다. 주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찢어진 마음을 회복시켜주시는 일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 되어 하나님의 원수의 길로 갔을 때에, 우리를 향해서 적대적인 발톱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오히려 우리를 위해 더욱 놀라운 사랑을 베푸셨다. 심지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하셨다(롬 5:10). 그래서 우리가 살아나게 되었다.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가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친구가 되어주고 있는가? 원수처럼 발톱을 드러내고 있는가?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