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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우느냐?(요 20:11-18)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셨다. 이러한 이야기는 쉽게 믿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유대인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원시적이고 미개한 사람들이어서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래서 죽음은 옛날에도 슬픈 일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고 믿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실제로 예수님이 살아나셨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하지 않았었다. 누군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환영하면서 그 소식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믿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탄생했다. 야훼 하나님만이 단 하나뿐인 하나님이며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생명처럼 고수했던 유대인들 사이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던 믿음이 탄생했다는 것은 부활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 미스테리일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잃었다는 사실 때문에 슬퍼했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하게 되었다.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 한 셈인데, 사실 상황이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예수님은 부활했었다는 바로 그 사실은 변한 게 없었다. 다만 마리아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알지 못했다가 나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 것만이 다를 뿐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슬픔이 기쁨으로 변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든 하지 않든, 객관적인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사실 그대로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그 사랑 속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 반대로 우리는 부모님이 진짜 부모가 아니고 나는 주워온 아이라고 의심하면서 집을 뛰쳐나가 외롭고 쓸쓸하게 방황하면서 살 수도 있다. 현명한 사람은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뢰하며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사람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는 담대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있을 것이지만, 부활을 믿는다면 당당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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