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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critic) 바이러스와 컴플레이닝(complaining) 바이러스

중국에서 시작한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그래도 우리나라는 제법 잘 방어하는 것 같았다. 중국에서 수만 명이 확진되고 사망자 숫자가 급격하게 증가했어도, 우리나라에서의 확진자 수는 겨우 몇 명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게 한순간에 뚫렸다. 신천지라는 이단 집단의 특이한 방식의 종교의식은 바이러스를 빠른 속도로 확산시켰고, 순식간에 누적확진자는 8천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도 70명을 넘어섰다. 급기야 전세계적 펜데믹(pandemic) 상황에 이르기까지 했다. 뉴욕 주에서는 500명 이상의 집회를 금지하여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 스프링캠프의 취소는 물론 정규시즌 개막은 뒤로 미루어졌다. 시카고에서는 패스트푸드 식당 안에서 음식을 먹을 수 없도록 명령을 내려 드라이브 쓰루를 통해서만 음식을 사가게 되었다. 모든 음악회는 취소되어, 음악이 생계수단인 시카고에 사는 우리 딸 아이네 재정에 빨간 불이 켜지고 말았다.

새로운 기대와 소망으로 2020년을 시작했건만, 그 어느 해보다도 힘든 시기를 우리 모두가 보내고 있다. 일상은 무너져버렸고, 대부분의 가정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조차 힘들어진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눈에 보이지 않은 작은 바이러스에 의해서 삶이 송두리째 무너져내리고 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어서 속히 이 상황을 종료시켜 달라고 간구한다. 아무리 사람이 노력하더라도,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다면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기에 겸손하게 엎드린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바이러스를 직면하면서 살아왔다. 이런 바이러스들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런 바이러스에 대해서 경계하지도 않고 인식하지 않은 채 산다. 그 바이러스들은 바로 크리틱(critic) 바이러스와 컴플레이닝(complaining) 바이러스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비말(飛沫)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되듯, 이런 바이러스는 우리들의 혀를 통해서 무차별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확산된다. 이 바이러스의 파괴력에 대해서 이미 야고보서에서 기록해 놓았는데,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를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것으로 그것은 지옥 불에서 기원하였다고 하였다(약 3:6).

부모들은 자신들이 하는 비난의 말이 자녀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지 인식하지 못한 채 함부로 말을 쏟아낸다. “너는 왜 그 모양이니?” 이 말 한마디에, 아이들의 자신감은 소진되어버리고, “이 바보야”라는 말 한마디에, 아이들은 마음은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한다. “그럴 줄 알았어. 그딴 식으로 행동하더니, 당연하지.” 이런 말 한 마디에 아이들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코로나19를 방어하기 위해 마스크를 사려고 길게 줄을 서는 열정보다 우리들에게 더더욱 필요한 것은 우리들의 입에 파수꾼을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기도하였다(시 141:3).

아내는 두 딸아이를 향해서 언제나 좋은 말을 해주었다. “너는 참 복이 많은 아이야.” “하나님이 특별히 너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선생님이 너를 정말 좋아하는가 봐.” “학교 친구들이 너를 참 좋아하는구나.” “할머니들이 너를 위해서 정말 많이 기도해주고 계셔.” “너는 참 대단한 아이구나.” “너는 어쩜 그렇게 똑똑하니?” “너는 어떻게 그런 대단한 생각을 했니?”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아이들은 행복해했고 눈이 반짝거렸다. 나는 아내가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할 때,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닌가 했다. 그런데 그런 말들이 아이들을 건강하게 자라게 했다.

사실 백인 동네에서 아시아계 학생이 학교를 다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람이란 참 악해서 겉으로는 친한 척해도, 은근히 인종차별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처음에 영어를 잘하지 못할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영어를 잘하면서 속상해하는 것이 그런 모습들이라고들 한다. 우리 아이들을 좋아하는 아이들만 학교에 있었겠는가? 그렇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좋아하는 아이도 있었겠지만, 싫어하고 인종차별하는 태도를 가진 아이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아이들에게 다른 아이들이 너를 왕따시키지는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친구를 데려오면 “너는 왜 그렇게 인기가 많니?”라고 말해주었다. 학교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면, “학교 선생님이 너를 참 좋아하는 것 같네” 그렇게 말해주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러울 수는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부족한 것만 보고 비난하고 불평하고 좌절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좋은 것을 보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기도 한다. 크리스천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 믿음은 보이는 것들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롬 8:28)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치명적인 크리틱(critic) 바이러스와 컴플레이닝(complaining) 바이러스의 슈퍼 전파자가 될 수 없다.

요셉은 어쩌면 크리틱(critic) 바이러스와 컴플레이닝(complaining) 바이러스를 퍼트릴 수 있는 슈퍼전파자가 될 수도 있었다. 형제들에 의해서 왕따를 당하고,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해야 했으니까 말이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비난하고 불평하고 이 세상에서 지옥을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요셉은 온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마 10:29), 지금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악한 것들도 불평과 비난의 재료가 아니라 감사의 재료들이다. 우리는 영적인 마스크를 써야 한다. 내게서 크리틱(critic) 바이러스와 컴플레이닝(complaining)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도록 말이다. 특히 사랑스런 우리 자녀들에게 전파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영적인 치사율 100%의 위험한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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