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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파도인가 쓰나미인가?

언제나 단기선교를 하러 가는 길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지만, 이번 단기선교는 특히 더 많았다. 코로나19가 발병해서 다들 극도로 긴장하는 가운데, 이번 단기선교 계획을 취소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처럼 지역감염이 확산되고 전국적으로 바짝 긴장하는 상황이었더라면 단기선교를 취소했을 것이다.

필리핀에서 화산이 터졌을 때, 단기선교를 예정대로 진행해야 할지 걱정되었다.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단기선교팀의 일정을 조정해서 마닐라 쪽에서의 사역을 제외하는 것으로 일정을 조정했다. 사실 마닐라 쪽도 화산 피해가 거의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안전 조치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까지 조치를 취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었다. 처음 계획과는 달리 마닐라 북쪽인 앙헬레스와 수비크 쪽에서만 사역하는 것으로 조정했다.

그런데 또다시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전염병이 확산되고 있는 시점에서 단기선교팀의 안전이 걱정되었다. 만일 단기선교를 하는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전염병에 걸리면, 그것이 몰고 올 여파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더 큰 재난을 가져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단기선교를 포기하는 교회들이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교회도 포기해야 할 것인가? 정말 많은 고민이 있었다.

어쩌면 단기선교를 취소해버리면 가장 깔끔하고 논란도 없을 것 같았다. 이미 많은 재정을 사용하였지만, 건강을 잃어버리고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손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그리고 모든 교회가 활동을 중단해버리는 상황에서 단기선교를 밀어붙였다가 만에 하나 전염병에 걸리게 되면 그로 인해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단기선교를 취소해야 한다는 여론은 강력했다.

그런데 정말 그래야 할까? 이게 우리들의 질문이었다. 사무엘하 10장에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죽자, 다윗이 조문단을 보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도망하던 시절에 나하스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런 시점에 조의를 표하고 암몬 족속과 평화의 관계를 더욱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 조문단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암몬의 신하들은 그 조문단이 오는 의도를 의심했다. 이들은 조문단을 가장한 첩자들이며 우리를 공격하려는 위장 전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암몬 족속은 조문단을 간첩들로 간주하고 그들을 모욕하고 쫓아내 버렸다. 이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과 암몬 족속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결국 암몬 족속은 전쟁에서 큰 피해를 보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그런데 그 조문단은 사실 간첩이 아니었다. 그 조문단은 다윗의 평화의 제스쳐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암몬 족속은 그들을 간첩으로 생각하고 적대하였기 때문에 파국을 초래하였다. 물론 암몬 민족 가운데에는 조문단을 조문단으로 순수하게 받아들이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만일 그들이 간첩이라면 너희가 책임질 수 있느냐?”라는 위협 앞에서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공포를 앞세운 논리를 이길 방법은 없다. 공포를 조장하는 쪽이 언제나 이기게 되어 있다. 결국, 간첩으로 몰아서 전쟁이 일어났고, 공포를 조장하는 사람들의 말대로 전쟁이 일어났으니 그들이 말이 맞았을까? 아니다. 그들을 조문단으로 맞이하고 이스라엘과 평화를 이루어나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공포를 조장하는 자들은 결국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망하고 말았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 302장 3절 가사이다. 우리는 이 파도가 작은 파도인지 쓰나미인지 판단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쓰나미이니까 모두 대피하라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작은 파도인데 뭘 걱정하느냐고 한다. 그런데 이 둘이 논쟁을 벌이면, 결국 쓰나미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항상 이기게 되어 있다. “작은 파도라고 생각했다가 쓰나미라도 된다면 그것 책임질래?”라는 말 앞에서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결국, 리더십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판단을 내려야 하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결정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리고 그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국가적 재난이 터지면 결국 그 모든 책임이 대통령에게 돌아간다. 그게 대통령의 자리다. 담임목사의 자리도 다르지 않다. 아무것도 행하지 않도록 하는 수준에서부터 모든 것을 정상적으로 하는 수준까지, 그 사이에 있는 어떤 수준을 선택해야 한다. 이때 책임을 회피하는 지도자는 모든 것을 중단하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모든 것을 중단시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비난을 받을 일도 책임을 져야 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지도자는 자격이 없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중단할 경우에 결과로 나타나는 것 역시 지도자의 책임이 된다.

문제는 어떤 수준을 선택할까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결정한다. 모두가 다 취소하는 분위기면 따라서 취소한다. 그게 안전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나 교회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가 아니라 정확한 사실에 근거해서 결정을 내리려고 했다. 적어도 그때에는 단기선교를 취소할 이유는 없었다. 코로나19가 일반 독감보다는 치사율이 높지만, 메르스나 사스 때보다 훨씬 낮고, 전염병에 걸렸어도 지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노년층이 아니라면 위험하지 않고 가볍게 지나갈 수 있으며, 필리핀의 경우 확진자가 3명인데 모두 문제가 해결되어 감염될 위험 자체가 사라진 상태였으며, 감염자와 같이 있더라도 눈코입을 통한 전염을 철저하게 방지하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것이었다. 전염병에 걸릴 확률이 복권 당첨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결국, 우리는 취소하지 않기로 했다.

단기선교는 쉽고 편한 길은 결코 아니다. 단기선교 갔다가 사고로 죽는 사람도 있다. 단기선교 갔다가 다치는 사람도 있다. 억류되거나 위험을 당하기도 한다. 그런 위험을 아예 방지하려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단기선교는 조문단일까? 간첩일까? 한쪽에서는 아주 위험하니 포기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다가 사고 나거나 죽으면 어떻게 할래?”라는 공포스러운 말로 설득한다. 그런데 또 다른 한쪽에서는 단기선교로 인한 유익이 적지 않다고 한다. 결국 교회는 진행하기로 했다. 다만 걱정하는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개별적으로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또한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 담임목사인 내가 같이 동행하여 위험한 부분을 체크하고 비상조치 계획 등을 점검한 후에 돌아오기로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진행된 단기선교는 그야말로 은혜가 풍성한 자리였다. 젊은 단원들은 이 기간이 너무나도 행복한 기간이었고, 변화의 기간이었다. 필리핀의 영혼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귀한 시간이었다. 단기선교를 다녀온 후 자녀들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고도 한다. 사실 단기선교는 우리가 없애야 할 “간첩”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의 “조문단”이다. 물론 쓰나미가 몰려온다면, 피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작은 파도를 보면서도 두려워 한 발짝도 옮기지 못해서는 안 된다.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14일이 지나 보아야 전염병에 걸렸는지를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도 혹시나 우리 가운데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 조바심이 생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더욱 엎드리게 된다. 주여 우리를 보호하여 주소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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