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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에 합당하지 않은 말씀

말은 진공 속에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의미있게 전달된다. 그래서 말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전해지는 상황 속에서만 의미가 발견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 25:11)라고 하지 않던가?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 말씀을 읽거나 듣는 사람들의 삶의 정황 속에서만 유의미(有意味)하다. 따라서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그것을 읽거나 듣는 사람들의 형편에 따라서 진리의 말씀이 될 수도 있고, 오히려 독약이 될 수도 있다. 같은 약이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이 될 수 있는 반면,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독약이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만나는 가장 흔한 실수는 번지수를 잘못 찾을 때이다. 경우에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신의 정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 아니라 죽이는 말씀이 될 위험도 있는 것이다. 가장 생생한 예가, 사탄이 들고 온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사탄은 시편 91:11-12의 말씀을 예수님에게 들려주었다. 하나님께서 발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보호하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말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탄의 입을 통해서 전달될 때, “아멘”으로 화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쳤다. 예수님이 들어야 했던 메시지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방식으로 사용되는 성경말씀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었기 때문이었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할지 분명히 하셨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위로와 평강의 메시지를 선포하지 않으셨다. 그들에게는 화와 저주의 메시지를 선포하셨다. 그들의 위선으로부터 돌이키길 원하는 마음에서 말이다. 그런데 마음이 상한 자들을 향해서는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지 않으셨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는 경우에 합당하지 않은 메시지를 남발한다. 거짓 선지자들은 아합 왕에게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주실 것이라고 예언해주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보호하시니 그런 예언은 정말 믿고 싶었던 예언이고 설득력있는 예언처럼 들렸다. 하지만 아합 왕에게 들려져야 할 메시지는 심판과 책망의 메시지였다. 미가야 선지자가 전했던 것처럼 말이다. 학개 선지자는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는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학개 선지자가 다윗 왕을 찾아가 똑같은 메시지를 전한다면, 참된 선지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다윗에게는 성전을 건축하지 말라는 나단의 메시지가 필요했었기 때문이다.

회개의 메시지를 들어야 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의 메시지를 들먹이는 황당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자주 목격한다. 성범죄를 저지른 목회자의 입에서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라느니,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뻔뻔한 말이 나오는 것을 종종 보았다. 회개를 거부하는 자를 향해서 사랑의 하나님을 말하면서 복음은 누구에게나 전해져야 한다는 궤변을 듣기도 했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전해져야 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죄악을 정당화하고 값싼 면죄부를 주는 방식으로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복음이라고 부르는 궤변을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현대판 거짓 선지자들을 많이 만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하면서 거짓 위로를 받는 것은 우리들에게 결코 유익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해야 한다. 나의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않으면, 때로는 사탄의 독약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유익이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씀뽑기의 위험성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은 축복과 평안과 위로의 메시지들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회개해야 할 인생이 위로와 축복과 평강의 메시지들만 듣는다면, 그것은 저주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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