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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주의적 신앙관점의 문제점

율법주의적 신앙관점은 기독교의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성경과는 거리가 먼 신앙관점이다. 그런 점에서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은 것이다. 율법주의적 신앙관점은 예수님께서 책망하셨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관점이고, 바울 사도가 싸워야 했던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관점이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율법주의적 신앙관점을 다른 복음이라 부르면서 그런 것은 복음이 아니라고 했고 그런 잘못된 복음을 전한다면 심지어 천사들이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갈 1:7-9). 그런데 우리는 늘 쉽게 율법주의적 신앙관점에 빠진다.

율법주의적 신앙관점은 신앙을 단순히 몇 가지 신앙의 법칙을 지키고 준수하는 것으로 축소시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단순히 하나님께서 원하실 것이라고 생각되는 계명들을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들의 삶에 필요한 것을 얻게 위해 신앙을 이용하게 만든다.

율법주의적 신앙관점의 근저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현재의 유익을 얻으려는 마음이 깔려있다. 결과적으로 율법주의적 신앙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신앙적으로 교만하게 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는 정죄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어 있다. 가족들 중에서 또는 교우들 중에서 자신보다 덜 싱앙적인 사람을 향해서 경멸하는 태도를 보이기 쉽다. 그 옛날 바리새파 사람들이 세리와 창기들을 향하여 경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더 나아가 목회자에 대해서는 합당한 존경의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방식으로 우러러보며 심지어 의존적인 현상까지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결국 목회자에게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단점들을 직면하게 될 텐데, 그러할 경우에는 역시 과도하게 정죄하는 태도를 보이거나 때론 신앙을 잃어버리기까지 한다. 무엇보다도 율법주의적 신앙관점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오늘날 교회개혁 운동의 문제는 율법주의적 신앙관점으로부터 탈피하여 성경적인 은혜의 복음으로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더 철저한 율법주의적 신앙관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준수해야 할 계명을 개선하고 더 철저한 것으로 바꾸면서, 그런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개혁이라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그런 개혁은 실패하기 쉽다.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 인류는 도덕적으로 그럴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 개혁에 앞장 섰던 자의 성적인 타락이 드러나는 충격적인 뉴스를 듣게 되는 것이고, 개혁이라는 칼날이 부메랑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보는 것이다. “개혁운동이라고 펼쳐나가면서 우리가 겉으로 표명하지 않았어도 내면화되어 있는 유교적이거나 도덕 윤리적 형식주의에 빠져 있으면 몇 개의 도덕 기준을 중심으로 하는 뼈 부닥치는 아픔을 생산하는 단체나 운동이 되어 버린다”는 김재영 교수의 지적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종교개혁 운동가들은 문제가 율법주의적 신앙관점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적인 은혜의 복음을 회복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율법주의적 신앙관점으로부터 성경적인 은혜의 복음을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크게 사람을 변화시키는가를 생생하게 목격한 바 있다. 영적인 교만함을 내려놓고, 자신의 철저한 무능함 앞에서 은혜의 복음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서는 것이야 말고 우리가 어서 속히 회복해야 할 모습이다. 그래야 “이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주님의 선언이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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