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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에 교회는 어떻게 해야하나?

지난 4월 11일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처벌 조항이 헌법에 불합치하다면서 2020년 12월 31일까지 해당 조항을 개정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결정으로 모든 낙태가 자유롭게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임신한지 22주 이내의 태아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 합리적인 사유가 있을 경우 낙태를 했다 하더라도 처벌하지 않도록 법령을 개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생명을 중시하는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진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결정은 결국 자유롭게 낙태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왜 우리는 낙태를 반대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살인의 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아기가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생명이 주어진다. 하나님은 모태에 사람을 짓기 전에 미리 아시고 배에서 나오기 전에 성별하시는 분이시다(렘 1:5). 그래서 그 생명은 아무리 태어나기 전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귀한 존재이고, 다른 사람이 그 생명을 앗아버리는 것은 살인의 죄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은 비록 불신자라 할지라도 이미 그 마음에 들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롬 1:20).

그런데 왜 사람들은 낙태죄 처벌 조항을 폐지하려 하는가? 그리고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에서는 헌법불합치의 결정을 내렸는가? 그 이유를 알고 있는가?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그냥 낙태는 죄라는 점만을 외친다면, 사람들은 교회의 외침에 귀를 닫아버릴 것이다. 사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는 전혀 대화가 되지 않는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 한 이유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사람들이 낙태죄 처벌 조항을 폐지하려는 것은 불신적인 동기 때문이고, 죄를 죄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거짓된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하는 악한 생각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악한 사람들이라고 정죄하기만 하면 우리의 임무는 다 끝난 것일까?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방식을 취하셨다. 예수님 당시의 세리들은 악한 죄인이었다. 그들은 분명 탐욕의 죄를 저지르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의 것을 착취하는 도둑질의 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세리들을 향해서 비난했고 그들과는 식사의 자리에도 함께하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님은 세리들에게 다가가셨다. 그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비난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이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그들을 천국의 잔치를 생각나게 하는 잔치에 초대하셨다. 그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삭개오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자신의 착취한 것이 있다면 4배를 갚겠다고 했고,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하는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선언을 하셨다. 이들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방식은 낙태죄 처벌 조항을 폐지하는 현 한국의 시점에서 여러 가지 시사점을 준다. 먼저 낙태는 죄가 아니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법이다. 예수님께서 세리의 죄를 지적하면서 정죄하지는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리가 행한 일들이 정당하다고 변호하신 적은 없다. 창기들도 받아들이셨지만 그들의 행위가 정당한 것이라고 변호하신 적은 없다. 오히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가르치셨고, 눈으로 보고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도 죄라는 사실을 가르치셨다. 따라서 이 시점에 낙태를 하는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며 죄가 아니라는 식으로 시류에 편승하는 것은 바른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낙태를 허용하고 있는 이러한 경향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여서 반대하면서 정치적인 압박을 가하고 비난하는 것도 별로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했던 방식이다. 우리는 낙태를 죄로 처벌하는 것이 가져오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도 귀를 열어야 한다. 낙태를 죄를 처벌할 경우, 과거에는 하는 수 없이 그냥 아기를 출산해야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낙태를 죄로 처벌한다고 해서 아기를 그냥 출산하지 않는다. 낙태를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불법적인 방법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낙태죄가 사문화되었다는 이야기가 여기서 나온다. 그런데 결국 불법적인 방법들은 산모를 더욱 위험에 빠트리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문제로 제기된다. 임신을 하게 한 남자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여성들에게만 과도한 책임을 부과하는 현재의 낙태죄 처벌 조항은 그런 점에서 문제로 제기되어 왔다.

태아의 생명을 존중한다면 또한 낙태를 고민하고 있는 여성의 삶에 대해서도 긍휼의 마음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남자들은 아무런 책임의식도 없이 있는데, 여성만이 임신과 출산과 육아의 사회적 경제적 모든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면, 그 고통의 무게가 너무나도 클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단순히 낙태를 죄로 정죄해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 처한 여성들의 상황을 보면서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마치 가난한 사람을 본다면 왜 학창시절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느냐, 왜 열심히 노력해서 살지 못하였느냐, 왜 술과 마약에 빠져 그런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느냐고 따지기 전에, 먼저 먹이고 입히고 돌보아 주어서 그들의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한 것과 같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면 왜 교통신호를 지키지 않았으냐, 왜 과속을 했느냐 등등 질문을 던지지 않고, 먼저 그 생명을 살리는 것이 급선무인 것과 같다. 성에 대한 건전한 성경적인 관점을 갖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행동해서 임신해버린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잘잘못을 따지고 그에 대한 책임을 다하라고 책망질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대신 우리는 그들을 품어야 한다. 그들이 낙태죄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쉽게 병원에 달려가 낙태하지 않도록, 그들에게 생명은 소중한 것이며 그리고 그 아기를 낳아 기르는 일에 혼자 있게 하지 않도록 우리가 함께 해주어야 한다. 사실은 낙태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죽기보다도 힘든 일이다. 하지만 수많은 여성들이 그 길로 달려간다. 왜냐하면 아기를 낳고 기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지탄을 받으며 길러야 하고, 경제적으로는 많은 어려움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모든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서 낙태의 길로 달려간다. 그 옆에서 우리는 그냥 비난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달려가 그 길 외에 다른 길이 있음을 알려주어야 하고, 생명이 소중한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총회적인 차원에서 미혼모를 위한 NGO를 만드는 일은 낙태죄 폐지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것보다 시급하다. 낙태죄 폐지는 낙태를 조장할 위험이 있어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것을 비난만 하는 것은 가장 쉬운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낙태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에게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재정적인 지원과 신앙적이고 정신과적인 상담을 지원하는 일은 어렵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성급한 성명발표보다는 어려움에 처한 분들을 돕는 기관을 설립하는 일을 당장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들에 온 교회가 도움을 주어야 한다.

앞으로 우리는 낙태죄 폐지와 같은 상황을 만나게 될 것이다. 몇 년 전에 간통죄 폐지 결정을 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성경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결정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은 우리가 신정국가가 아닌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만나게 되는 일들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때,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생각할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치적인 힘을 키우는 방법도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다. 물론 크리스천 정치가들은 교회에 이익을 던져주는 그런 정치가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반영한 정치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크리스천 정치가들로 가득 채워서 기독교적 세상을 만들겠다고 하는 꿈은 불가능한 꿈이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힘을 동원하는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참된 믿음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굴복시켜야 한다. 바벨론에서는 우상을 세우는 일이 국가적인 정책이었던 것처럼, 신정국가가 아닌 대한민국에서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결정들이 많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때 우리는 다니엘과 세 친구의 행동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우상을 무력으로 파괴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신정국가였던 이스라엘에 있었다면 기드온처럼 우상을 파괴했겠지만 말이다. 그들은 바벨론에 살고 있기 때문에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그들은 하나님께 굴복했다.

낙태죄가 폐지되어도 낙태가 잘못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안다. 간통죄가 폐지되었어도 혼인의 울타리 밖에서의 간음이 악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이 마음대로 죄를 짓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갈 때 이 세상에 빛이 비추어지는 것이다. 사랑으로 품을 때 사람들은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낙태죄 폐지는 기독교에 위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복음의 빛을 더욱 밝게 비추게 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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