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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 – 십계명 강해 9

이 시대는 성적인 문란과 성적인 범죄가 아주 넘쳐나고 있는 시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한때 잘 나가던 정치인들이 성적인 스캔들로 인해서 낙마하는 이야기가 지금 우리의 뉴스에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각 분야의 이곳저곳에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하는, 그런 고발 운동인 미투(MeeToo)가 지금 벌어져서, 결국 그 가해자들이 재판에 넘겨지고, 유죄 판결을 받게 되는 그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행위들은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일어나는 행위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우리가 십계명 가운데서 제7 계명이라고 할 수 있는 “간음하지 말라”라고 하는 이 말씀을 우리가 함께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성은 더럽고 추악하기 때문에 우리가 멀리해야 할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성이 무엇인가? 더럽고 추악한 것이고, 우리가 가능하면 멀리해야 될 것이 성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이라고 하는 점을 먼저 우리가 잘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해 주셨고요. 뿐만 아니라 그 인간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을 주신 사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세 가지 법칙, 세 가지 규례를 주셨다고 합니다. 그 세 가지 규례, 세 가지 법칙이 무엇이냐 하면, 노동의 규례, 노동의 법칙, 안식의 규례, 안식의 법칙, 그리고 또 하나는 결혼의 규례를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를 영적인 일, 신앙적인 일,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일,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일은 아주 거룩한 것이지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찬송하고 경배하고 하는 영적인 일이 아닌, 이 세상의 일을 하는 것은, 흔히 그것은 세속적이고 더러운 것이고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경향들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노동을 한다든지 아니면 부부 생활을 한다든지 아니면, 가족을 돌본다든지 하는 것들은, 이것은 별로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고, 세속적인 일인 반면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경배하는 것만 거룩한 일이라고 그렇게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그렇게 바라보는 것은 건전한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라, 사실은 잘못된 성속이원론(聖俗二元論)의 관점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보통 우리 사람들 가운데는, 성속이원론, 혹은 영과 육의 이원론의 사고방식에 잡혀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무엇이 거룩한 것인가? 영적인 일,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은 괜찮은 일이지만, 육적인 일을 하고, 이 세상의 일을 하는 것은 아주 더러운 것이고,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육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절제해야 되는 것이고, 그것은 억눌러야만 하는, 오히려 영적이고 고상한 일을 하는 것만이,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경향들이 많이 있는데 사실은 그것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닙니다.

헬라 철학자들 가운데는 흔히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플라톤이라고 하는 그런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 철학자는 모든 것을 이원론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육체를 가진 것, 그리고 이 세상적인 것, 이것들은 다 가치가 없는 것이고,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데아(idea)의 세계, 영적인 세계, 그런 누메나(numena)의 그런 세계가 진짜 좋은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육체적인 사랑은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이고, 진짜 사랑은 무엇인가? 플라톤이 그런 정신적으로 아는 사랑이야말로, 진짜 사랑이라고 주장한 것이 바로 플라톤의 관점인데요. 그것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라, 사실은 헬라 철학적인 관점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람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 독신으로 사는 것은 사람들이 아주 고상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누가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혼자 독신으로, 그래서 평생 처녀로 평생 총각으로 그렇게 산다고 하면, 사람들이 그 사람을 바라볼 때 아주 고상하게 생각합니다. 특별히 종교인들 가운데는, 그렇게 독신주의를 고집하는 종교인들이 있어요. 어디가 그렇죠? 예 천주교에서 보면, 신부님들이 평생을 독신으로 삽니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은 수녀가 돼서 평생 정절을 지키면서 혼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불교의 모든 종단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조계종이 비구종단입니다. 조계종이 비구종단이기 때문에 조계종의 법사님들, 그 스님들은 결혼하지 않고 사는 그 삶을 살고 있는데, 보통 사람들은 다 결혼하고 살잖아요? 우리들은 다 결혼하고 살고, 성적인 그런 욕구가 있는 상태에서 살아가는데, 그런 독신주의를 쓰는 그런 종교인들이 평생 성적인 욕구를 억제하면서 혼자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참 저분은 고상하신 분이구나. 야, 저분은 정말 정말 수준이 높으신 분이구나. “대단한 분이구나”라고 그렇게 우러러보는 경향이 우리들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물론 실상을 파헤쳐 본다고 하면, 뒤에서 자신들의 욕구를 분출하고 있는 추악한 모습들이 쉽게 드러나는 경우를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중세 시대 때 천주교를 보게 되면, 중세시대 때 고아원들에는 고아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고아들이 다 누구라고 그러죠? 신부와 수녀 사이에서 나온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 고아원의 역사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겉으로는 독신으로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온갖 추악한 일을 벌이면서, 결국 그렇게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중세 천주교에서 있었던 일인데, “그러한 일들이 오늘날에도 반복되지 않느냐?”라고 질문을 던진다면, 거기에 확실하게 그런 일이 더 이상 없다고 이야기할 수가 없는 거예요.


오늘날 뉴스를 들어보면 오늘날에도 수많은 천주교 신부들이 성추행을 해서 문제가 되었고, 특별히 제가 살던 필라델피아라고 하는 그 지역에서 펜실베니아 지방에서 수많은 성직자들이 천주교 신부들이 아동을 성추행한 걸로 인해서 경찰의 조사를 받고 고소를 당하고 어마어마한 배상을 해줘야만 했다고 하는 그런 뉴스들을 종종 들을 수가 있는 것이고요.


역시 불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많이 밝혀지지 않는 상황 가운데 있지만, 그러나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욕구 자체를 억제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쉽지 않은 것이고, 쉽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그 창조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어요.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이냐?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이냐면 여러분들은 혼자 사십시오. 결혼하지 말고 정절을 지키며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라고 가르쳐주고 있어요. 창세기 2장 18절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뭐 하니?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천지를 창조하실 때마다 하나님께서 선언하셨어요. 뭐라고 선언해 주셨습니까?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것을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십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모든 것에 대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보시기에 좋았더라 했는데, 천지창조를 하시면서 보시기에 안 좋았던 것이 한 가지가 있어요. 그게 뭐예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게 보셔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만들어 주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그래서 그 두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규례를 만들어 놓으신 것이 하나님의 그것이 섭리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먼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성이라고 하는 것은 더럽고 추악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결혼하지 않거나 가능하면 욕구를 억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그것도 거룩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성경적인 원칙을 발견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서 그런데 제7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은 성적인 관계 자체를 다 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려야 할 그 범주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어디에서만 허용이 되는 것이죠? 정당한 부부 관계 사이에서만 허용이 되는 것이에요. 정당한 부부 관계 속에서 성적인 관계를 누리게 될 때, 그것은 거룩한 것이 되고, 정말 행복의 도구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게 되는 그런 아주 귀한 방편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범주를 벗어나버리면 그것이 죄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간음이라고 하는 것은 정당한 부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성적인 관계 이외에, 그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된 관계를 가리켜서, 간음이라고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엄하게 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법칙 속에서 움직인다고 한다면, 우리들에게 유익이 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 법칙을 넘어서서, 움직이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저주거리로 변해버리는 겁니다.


식욕 자체가 죄인가요? 식욕 자체가 죄는 아니죠. 배가 고프면 먹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고, 하지만 그것이 과도해서, 그 식욕 자체가 너무나도 커서, 그래서 내게 주어진 것을 먹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지지 않는 것을 먹는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이 되죠? 죄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욕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바운더리(boundary)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정확한 범주에서부터 벗어나게 되면, 그것은 잘못된 것인데,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잠언서 5장 15절부터 18절의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내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이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과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이런 말씀을 해주시는 것인데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축복의 관계 가운데서 이루어질 때, 거룩하고 복되고 행복의 방편이 되는 것인데, 그러한 하나님의 그 범주 밖으로 넘어가게 되면, 그것이 우리들에게 죄가 되는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간음을 금하셨을까요? 왜 간음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에서 나오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행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왜 기도에 응답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왜 이런 시련을 내게 주시는가? 그 모든 대답이 다 하나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죠.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간음을 금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적인 그 쾌락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범주 내에서 누리고,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건 정당한 것일 수 있겠는데, 그것을 넘어서서 이 성적인 쾌락이 나의 우상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간음을 금하시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들에게 우상으로 바뀌어버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본도 우리들에게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 있으면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인데, 그 돈이라고 하는 것이 어느 날 우리들에게 우상이 되는 그 순간,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이고, 그 돈이 우리를 착취하게 되고, 우리를 아주 피폐하게 만들어서, 우리를 죽여버리는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런 우상을 돈을 우상으로 만들 때 나오는 결과가 아주 비참한 것이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우상이 될 가능성이 많은데요.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이 어느 순간에 우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자녀가 우상이 되어버리면, 결국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행해지는 것이고요. 뿐만 아니라 사랑도 참 좋은 것이지만, 사랑 자체가 우상이 되어버리면, 그것이 우리들을 아주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인데요.

쾌락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쾌락이라고 하는 것은 나쁜 것인가? 아니요. 즐거워할 수 있으면 좋은 것이에요. 기뻐할 수 있으면 좋은 것이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 하면 좋은 것인데, 그 쾌락이 어느 순간에 우상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우상이 되어버리면, 그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우상이 아니면, 그냥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바운더리(boundary) 속에서 적절하게 사용할 때, 기쁨과 행복의 수단이 되어버리지만, 그 쾌락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우상이 되어버려서, 그 쾌락을 느끼기 위해서 바운더리를 넘어가게 되고, 그래서 그 바운더리를 넘어가서, 쾌락을 추구하게 되면, 결국은 행복할 것처럼 보이지만, 행복할 줄 알고 그런 쾌락을 추구하게 되지만, 결국은 그것으로 인하여서 우리 인생이 아주 깨어지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픔을 주고, 그리고 모든 그 삶을 파괴시켜 버리는, 어마어마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간음이라고 하는 죄를 지을 경우에, 그것을 죄를 짓는 그 순간에는 달콤함에 취해서, 그것이 그렇게 나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마치 마약과 같이, 그리고 도박과 같이, 술과 같이 당시에는 그것에 취해서 괜찮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위험성과 그 파괴적인 결과를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간음하는 그 단계로까지 넘어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금하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말씀을 우리가 마음속에 깊이 새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간음이란 죄는 무엇인가? 간음이라고 하는 죄는 죄 가운데서도 중한 죄에 해당합니다. “죄의 경중이 있느냐?”라고 하는 질문을 던져보면, 대답을 예스 앤 노(yea and no)라고 대답을 할 수가 있겠는데요. 죄는 한편으로는 경중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는 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심판을 받을 만한 충분한 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인죄를 저지른 사람이나, 도둑질을 한 사람이나,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사람이나, 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어마어마한 죄라고 하는 점에서, 죄는 따로 경중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어떤 죄가 더 크다. 어떤 죄는 좀 가볍다”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죄를 우리가 다 그런 관점으로 바라봐야 되는데요. 모든 죄가 다 심각한 것이라고 하는 관점으로 바라봐야 되는데,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착각했어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저 창기와도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고,” 나는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기도했는데, 주님께서 그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바리새인이 괜찮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했던 그 세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더 들으시고 인정하셨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왜냐하면 그 세리의 죄도 큰 것이지만, 사실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간음의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살인한 것도 도둑질한 것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사실 바리새인들도 여러 가지 교만의 죄, 미워하는 죄, 등등 여러 가지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사실은 그 모든 죄가 다 똑같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누가 누구를 향해서 돌을 던질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다 심각한 죄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모든 죄는 다 동등한, 경중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 똑같은 죄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종종 그렇기 때문에, 모든 죄가 다 똑같은 건데, 왜 특별한 죄에 대해서만 뭐라고 하느냐고 하면서, 정당한 치리나, 정당한 훈육 권고 자체를 무시하는 경향으로 우리 성도들이 반응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분이 간음의 죄를 저질러서, 그래서 그 간음의 죄를 저지른 사람을, 우리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로 세울 수 없다고 이야기할 때, 교회에서 종종 나오는 이야기가 무슨 얘기냐면, 우리가 다 죄인인데, 누가 누구를 향해서 돌을 던질 수 있겠느냐고 말하면서, 그 간음죄를 저지른 사람을 두둔하는 그런 경우가 우리 한국교회에 너무나도 많이 있어 왔어요. 모든 죄가 똑같다고 하는 것을 그렇게 적용하시면 안 돼요.


한편으로는 모든 죄가 다 똑같습니다. 살인의 죄나 마음속으로 미워한 죄나 다 똑같이 하나님의 엄청난 심판을 받을 만한 똑같은 죄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권고로만 끝날 수 있지만, 어떤 죄의 경우는 권고로만 끝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다루어야만 하는 심각한 죄의 종류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해야 되는데요. 그 죄 가운데 하나가 간음의 죄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교회 내에서 거룩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교회 내에서 만일 영적인 지도자들 가운데, 간음의 죄를 저지른다고 하면, 영적인 지도자의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사역을 내려놓아야 하는 겁니다. 영적인 지도자의 자리에서 내려놓아야 하는 것인데, 그런 사람들을 두둔하면서, 우리가 다 죄인인데, 누가 누구를 향해서 돌을 던지느냐 하면서, 그런 사람을 두둔해서도 안 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다 똑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죄를 범한 사람과, 마음으로 죄를 진 사람과, 그리고 알면서 죄를 지은 사람과, 모르고 죄를 지은 사람과, 지도자가 지은 죄와 지도자가 아닌 사람이, 지은 죄에 그 영향력과, 그 크기가 다르고, 만일 선생 된 자가 더 큰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처럼, 그만큼 더 큰 심판과 더 큰 책임감이 있는 죄가 있다고 한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9절서부터 13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에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들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쫓아내야 될 죄가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에요. 물론 회개의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용서하고 받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어떤 심각한 죄라고 할지라도, 진실로 회개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는, 그 큰 죄악을 저지른 사람에게도 임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가 있다고 한다면 성도로 받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로 받아준다는 것과, 그러한 사람을 영적인 지도자로 세운다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회개했다고 할지라도 함부로 다시 영적인 지도자로 세워서는 안 되는 것이고, 아주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서만, 다시 세워질 수 있는 것이지, 함부로 세워서 복음이 훼손되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간음의 죄라고 하는 것이, 다른 죄도 물론 다 심각한 죄지만, 이것이 아주 큰 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 성도들이, 우리 모두가 다 기억해야 되고, 특별히 영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더 심각하게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의 세대는 간음의 죄는 처벌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의 사회적인 경향입니다. 요즘의 사회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으면, 실제적으로 어떤 정신적이거나, 그리고 어떤 그것을 입증할 만한 피해나, 아니면 물질적인 그런 피해가 없다고 한다면, 형사 처벌을 하지 않는 경향이 이제 앞으로 계속되는 경향이기 때문에, 이미 간통의 죄는 처벌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바뀌었습니다. 앞으로 법은 더 바뀔 것이고, 앞으로는 이런저런 음행에 관련된 죄들은 아마 대부분 다 무죄로 그렇게 처리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든지 간에, 우리 성도들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주신 그 거룩한 그 바운더리 속에서 있어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서 간음의 죄는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 않았더라도, 마음속으로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마음이 빼앗기지 않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사실 모든 것이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것인데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부터 벌써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가면서, 음욕의 마음을 품었다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은 이미 간음의 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7절 28절의 말씀인데요.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음탕한 눈으로 이성을 바라보게 된다고 하면, 그것은 실제적으로 간음의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간음죄를 저지른 것과 같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인데요. 그것은 우리가 이성을 보면서 순식간에 스치는 그런 음욕과 같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하죠. 우리가 그런 단계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헬라어 원문을 보면,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본다고 할 때” 사용된 동사의 형태가 현재형으로 되어 있어요. 근데 이 현재형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뉘앙스가 “계속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이성을 보고 그런 성적인 생각이 떠오르는 것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계속해서 음욕을 품고 계속해서 의도를 가지고 바라보는 것 자체를, 예수님께서는 이미 간음을 범하였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쁜 생각이 떠오르는 것 자체를 막을 방법은 있나요? 없나요? 없어요! 좋은 물건을 보고 저거 가셨으면 좋겠다고 하는 탐욕적인 마음이 생기는 것, 도둑질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 또 죽여버렸으면 좋겠다고 하는 미워하는 마음이 순식간에 드는 것, 그리고 음욕의 생각이 순식간에 드는 것 자체는 우리가 막을 방법이 없어요.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우리가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컨트롤한다고 해서 컨트롤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보면 보면, 견물생심이 되는 것이고, 음욕이 솟는 것이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가능한 것인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 자체를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 떠오르는 생각을 가지고 계속해서 음탕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죠. 한 번 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보는 것이죠.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새가 당신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새가 당신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그 새가 당신의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기분 나쁜 생각이 들 수 있어요. 우리들의 마음속에 탐욕적인 생각이 잠시 떠오를 수 있어요. 우리들의 마음속에 음욕이 잠시 떠오를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떠오르는 것까지는 어쩔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계속적으로 발전시켜서 머릿속으로 상상을 하고 또 의도를 가지고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죄가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이라고 하는 축복의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면 제 7계명과 같은 그 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성경적인 원리로 돌아갈 때 가능합니다. 방법은 단 하나예요.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그리고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키고 유지해 나가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남편을 사랑하시고 아내를 사랑하셔요. 그 사랑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지금까지 결혼해서 수년을 살아오면서, 남편으로부터 받은 이런 상처, 저런 상처, 아내로부터 무시당하고 인정받지 못해서 받은 이런 상처 저런 상처들 때문에 안타깝게도 우리 가정들은 남편과 아내를 향해서 서로 문을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그리고 닫아버린 그 문을 다시 열지 않고, 그렇게 살아오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때 했던 말 한마디, 그때 보여주었던 행동 하나가 내 마음에 상처를 주어서, 그 분야에 대해서는 이미 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또 저 문을 닫아버리고 또 이런 문 저런 문들을 다 닫아버리기 시작하면서, 그 관계가 개선되지 않고, 쭉 지내오게 되는 것이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문제,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 그래서 우리는 너무나도 상처를 많이 받은 나머지, 어떤 부분에서는 열려있지만, 이렇게 또 닫아버리고 저렇게도 닫아버려서, 그 관계가 삐걱삐걱 거리고 그런데 그것 깨지도 못하고 그냥 그 관계로 어정쩡하게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내고 몇 년이 지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그 결과 결국 우리는 같이 살면서도 나 혼자 광야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거예요. 같이 사는데, 동반자가 아니라, 그냥 나 혼자 외롭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정말 메말라버려서, 내 주변이 완전히 다 메말라버려서, 그래서 정말 너무 외롭게 살아가고 있어서, 그 부부와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게 살아온 겁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어디에 있었냐면, 사실은 두 사람의 관계는 내가 계속해서 마음을 열고, 사랑의 물을 자꾸만 뿌려줘야, 내 주변이 광야로 변하지 않고, 푸른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는 옥토로 바뀔 수가 있는 건데, 내가 이 마음을 닫아버리고, 사랑의 물을 더 이상 주지 않고, 닫고 닫고 하는 가운데, 결국 내가 광야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비록 전의 상처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내 마음의 문을 열고 또 똑같은 상처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물을 내 주변에 뿌리기 시작해서, 다 말라비틀어진 그런 황량한 광야 같은 내 주변이 내가 마음을 열고 물을 뿌리고, 또 뿌리고 또 뿌리다 보면, 거기서 풀이 솟고 열매가 맺히고 좋은 관계가 회복되게 되는 그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겁니다.


내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그 결과, 나에게 유익할 줄 알았던 내가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닫았지만, 그 결과는 내게 치명적이고 결국 내가 광야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다시 한번 힘과 용기를 내서 사실은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우리에게 가정을 주셨기 때문에 그 관계를 발전시키고 회복시켜 나가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갈 때, 우리가 그 우리의 쾌락을, 우리의 마음의 위로를,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그 바운더리 밖에서 찾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그 바운더리 속에서 찾게 되는 놀라운 회복의 경험이 있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그런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했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고 마치 고멜이리 호세아를 배반하고 창녀가 되어 나갔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신랑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돈을 짝사랑해서 우상을 섬기고, 돈이 내 신랑인 것처럼 권력이 우리의 신랑인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신랑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 세상에 우상의 길로 딴 남자를 찾아 헤매는 창기들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해주실 응당한 반응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우리를 향해서 이혼 증서를 써주고 우리와의 관계를 해지해버리고 우리에게 영원한 심판을 주셔도 할 말이 없는데, 놀라운 것은 우리들의 허물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피 흘려주시고, 우리가 돈을 얻기 위해서, 권력을 얻기 위해서, 명예를 얻기 위해서 쫓아갔다가, 그래서 만신창이가 돼버린 완전히 우리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버린 우리들의 그 상처 난 부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씻어주셔서, 우리를 회복해 주신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받은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간음하지 말라라고 하는 이 말씀은 사실은 내가 간음하지 않고 참고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그 아름다운 부부 관계 회복을 주 안에서 누림으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성취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온 가족들이 우리 온 가정들이 주의 은혜 가운데서 회복되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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