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어느 교회에서 야유회를 갔는데 식사할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준비하여 간 음식을 펼쳐놓고 먹을 만한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가까운 교회의 문을 두드렸다고 한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을 잘 알고 있는 사이였기 때문에 찾아가서 부탁을 하고 친교실에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줄 수 있을지를 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교회의 담임목사는 출타 중이었고 대신 부목사가 그 이야기를 듣고는 그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참으로 아쉬웠다. 속사정이야 자세히 모르니 비난할 일도 아니고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겠지만, 그런 모습이 그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한국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모습일거라는 생각 때문에 아쉬웠던 것이다. 사무엘상 21장에 기록된 아히멜렉 제사장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히멜렉은 성소에 찾아온 다윗과 그 소년들이 배고팠을 때에 그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다. 빵이라고는 오직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밖에 없었고, 제사장이 아니었던 자들에게 주는 것이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놀랍게도 아히멜렉은 그것을 다윗과 소년들에게 제공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굶주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친절을 베푸는 일에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성경을 항상 읽고 묵상하는데도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기는 어렵다. 여전히 우리들은 강도만난 자들을 보면 이런 핑계와 저런 핑계를 대면서 도와주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던 말씀은 전혀 기억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이지만, 그와 똑같은 계명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임을 항상 잊고 산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야기도(히 13:1-2), 나그네 되었을 때에 대접해준 자들을 칭찬하였다는 양과 염소의 비유(마 25:31-46)를 읽었어도 실제 생활 속에서 적용되지 않는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빵을 주었다가 결국 사울 왕의 칼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사랑을 받은 자들이 우리들이 아니던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떡을 제공하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그 놀라운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면, 적어도 우리의 이웃들에게 매몰차게 친절을 거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랑은 실제적으로 친절을 베푸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