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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설병과 골리앗의 칼(삼상 21:1-9)

다윗은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급하게 도망하느라 먹을 것도 챙기지 못했고 사울 무기도 없었을 때, 그는 성전으로 갔다.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가서 거짓말을 해서 안심시켰다. 이러한 거짓말의 행위는 옳은 행위가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장점만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단점들도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의 행위가 정당한 것인지 다른 곳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아히멜렉은 다윗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진설병을 주었다. 사실 이 진설병은 오직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레 24:9). 이렇게 진설병을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소년들에게 준 일은 옳은 일이었을까? 잘못된 일이었을까? 분명 율법을 어긴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다윗에게 진설병을 준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혼란스럽다. 웃사의 경우 율법대로 지키지 않아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왜 아히멜렉의 경우에는 율법을 어겼는데도 잘못이 아닌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율법의 문자와 율법의 정신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율법의 문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율법의 정신이다. 그런데 종종 사람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데 율법의 정신을 망각할 때가 있다. 제사가 그랬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철저하게 제사를 잘 드렸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제사를 드리면서 그들은 여전히 죄를 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개하는 마음이 없이 제사만 드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신 이유는 재물을 우상으로 삼지 말라는 의미에서였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아주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렸다. 심지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렸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물질을 사랑했고, 그 물질을 때문에 악랄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웃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율법의 더 중한 것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저버린 채 십일조만 드린 것이다.

이에 반하여 아히멜렉을 율법의 규정을 어겼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 성전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성전은 낙망한 사람들이 와서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는 곳이었다. 아히멜렉은 사랑의 눈으로 다윗을 보았고 그를 도와주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맞게 행동한 것이었다. 결국 이 일로 인하여 아히멜렉은 사울 왕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는 다윗을 돕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놓았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계신다. 그분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떡으로 주셨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다윗이 성전에게 갔을 때 필요를 채울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주님 앞에 갈 때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이고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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