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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칼집에 꽂으라(요 18:1-11)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긴 가룟 유다를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만나 그 은혜와 축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배반해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사역에 가룟 유다와 같은 악역이 꼭 필요했던 것이지만, 가룟 유다 자신은 화가 있는 삶이 되고 말았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다(막 14:21).

우리는 악역을 자처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악역도 필요하고 선한 자도 필요하다. 하지만 기왕이면 우리는 악역이 아니라 선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소망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를 평화의 도구, 사랑의 도구, 선한 일에 사용되도록 간구해야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는 데에는 미적거리면서 나서지 않으려고 하는데, 악역을 감당하는 것은 누가 부탁하지 않아도 나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악역으로 사용되지 않기를 사모해야 한다.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베드로와 같은 사람도 있었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 칼을 빼어들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버리는 일에 앞장섰는데, 베드로는 정 반대로 주님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를 칭찬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칼을 칼집에 넣으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칼을 사용하는 자는 결국 칼로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베드로처럼 힘과 권력을 사용해서 선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진리는 무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기독교가 타락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가 파워를 갖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역사학자들은 진단하는데, 그러한 진단은 정확한 진단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가 힘이 없고 소수였을 때에는 복음을 잘 전파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힘이 있는 자들이 힘이 없는 기독교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었다. 하지만 요즘은 기독교가 힘을 가지고 복음의 메시지를 강요하는 시대가 되었는데,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다. 복음은 강압으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열두 영이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악당들을 물리칠 힘이 있으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십자가의 길을 갔다. 그리고 사람들을 구원해 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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