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생에 늘 처음 경험하는 것을 선사했던 큰딸이 결혼했다. 남들은 평생 한 번 하는 결혼식을 우리 딸은 요란하게도 세 번씩 했다. 본식은 6월 8일에 시카고에서 양가 부모와 지인들이 있는 곳에서 했지만, 한국의 친척들과 우리들의 지인들을 위해서 6월 22일에 우리 교회당에서 했고, 그 이후에는 바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이번에는 신랑 측 친척들과 지인들이 있는 캘리포니아에서 결혼식을 한 것이다.
시카고 예식을 위해 우리가 식장을 방문했을 때에는 깜짝 놀랐다. 아직 학생 신분인 신랑과 아직 생활이 정착되지 않은 딸이 결혼식 비용을 아끼는 가운데 예식을 진행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예식장으로 쓰려고 빌린 건물은 마치 창고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결혼예식인데 이렇게 창고 같은 곳에서 결혼식을 하겠다고 했단 말인가? 결혼식 비용을 아끼라고 신신당부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런데 결혼식을 하루 앞둔 날 신랑과 신부, 그리고 친구들, 그리고 양가 부모들이 모여서 결혼식 리허설을 하고 그 식장을 꾸미기 시작했다. 거무칙칙한 의자에는 하얀 천을 덮었고 금빛 장식을 둘렀다. 테이블에도 하얀 천을 깔고 벚꽃 나무 장식과 찻잔 장식을 더했다. 바닥에는 신랑과 신부가 걸어갈 카펫을 깔고, 단상도 나뭇가지 장식과 전구를 배열했다. 그리고 헬륨가스를 불어 넣은 커다란 풍선들을 달아놓았다. 몇 시간 동안 그렇게 열심히 예식장을 꾸민 결과 정말 멋진 식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허접한 창고처럼 보였던 그곳이 단 몇 시간 만에 그 어느 곳에 내어놓아도 빠지지 않을 멋진 식장으로 변한 것이다. 결혼식이 끝난 후 그 식장을 빌려준 주인이 딸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멋진 식장은 지금까지 대여해준 역사상 가장 뛰어난 것이었고, 그 멋진 장식들을 없앤다고 하니 마음이 슬프다고 말이다.
한참 지난 후 딸 아이의 페이스북에 그 당시에 촬영했던 사진들이 올라왔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그때의 멋진 추억을 돌아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한 가정을 이루어 출발하는 것은 정말 기적적인 일이었고,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었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았다. 결혼이란 게 그런 것이지. 허접한 창고를 하나씩 꾸며서 멋지고 화려한 식장으로 바꾸듯이, 아직 미완성이고 불완전한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일구고 가정을 가꾸면서 행복을 만들어 나가는 게 결혼이지 하고 말이다. 우리 딸 아이의 신랑은 아직 학생이다. 그것도 미국 내에서 가장 취업률이 떨어진다는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이다. 그래서 부모로서는 딸 아이가 힘든 상황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못내 불안하다. 그런데 돈도 많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모든 것을 다 갖춘 신랑감이라면 걱정거리가 좀 줄어들 수 있을까? 그런데 결혼이란 완벽하고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들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부족한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고 채움을 받으면서 성장해 가는 것이 아니던가.
사실 우리도 그렇게 출발했다. 30년 전 내가 결혼할 때에는 신혼집을 마련할 수도 없어서 그냥 처가에 들어가 신혼을 시작했다. 나는 정말 가난한 신학생이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둘이 같이 있는 것이 행복했고, 여러 가지 성격 차이로 인해서 고통스러운 날들도 많았지만 조금씩 맞추어가면서 여기까지 걸어왔다. 결혼생활의 위기는 너무나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때마다 견디며 올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서로가 부족하기 때문에 서로 채워주며 채워가는 것이 결혼인데, 요즘은 너무 완벽한 짝을 찾으려고만 하는 것은 아닐까? 자신은 그렇게 완벽한 짝이 아니면서 말이다.